공책과 연필

딸아이의 중학교 기말고사 준비 과정을 보다가 호기심이 들었다. 딸은 교과서와 공책 없이 문제집만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아내에 따르면 요즘 학생들은 대부분 교과서나 노트에 메모를 하지 않고 정리도 않는다고 한다. 선생님들이 교과서 없이 인쇄물을 통해 수업을 진행하고 공책 정리를 권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열린 교육이 확산되면서 선생님들이 일방적 주입식 교육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뇌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때까지는 뇌에서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들보의 얼개가 완성되고 종합적인 사고가 가능해지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때는 ‘평생 공부’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알맞은 때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평생 공부의 주춧돌은 메모와 정리다.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실학의 대가 정약용의 천재성도 바로 메모와 정리에서 나왔다.

한 양대 정민 교수의 명저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 따르면 18년의 유배생활에서 600여권의 저술을 완성한 정약용은 "기억을 믿지 말고 손을 믿어 부지런히 메모하라"며 "메모는 생각의 실마리이며 메모가 있어야 기억이 복원된다"고 강조했다. 다산은 또 "메모 중에서 쭉정이는 솎아내고 알맹이를 추려 계통별로 분류하라"고 권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손을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라고 했고 옛 소련 출신의 미국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정신의 일부’라고 했다. 현대의 뇌 과학은 손과 뇌의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뇌 마루엽에 있는 운동중추의 30%는 손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신경세포 하나는 1,000~1만 개의 다른 뇌세포와 연결되므로 손 운동과 관련 있는 세포는 다른 종류의 뇌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초등학생들이 연필 대신 샤프펜슬이나 볼펜을 쓰는 것도 걱정스럽다.

아이가 연필을 쥐고 신경을 써서 글씨를 쓰면 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 힘을 줄 때와 뺄 때에 따라 뇌가 자극을 받는다. 또 글자를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쓰면서 틀리는 것을 지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매듭짓는 능력을 키운다. 아이는 신중해지고 책임감도 생긴다.

시대가 바뀌면서 방과 후에 운동장에 노는 아이가 없는 것도 뇌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비교육적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뇌에서 가장자리계가 발달하기 때문에 정서와 사회성의 골격이 완성된다. 요즘 아이들은 함께 놀면서 이런 틀을 완성시킬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더구나 가장자리계의 해마는 정서뿐 아니라 기억과도 관련이 있다. 정서가 잘 형성돼야 기억력도 좋아진다. 또 뇌활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눈확엽’과 정신이 맑게 깨어있도록 유지하고 집중시키는 ‘망상활성화계’도 뇌의 정서영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학교에서는 방과 후 운동장에서 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느냐고 항변하지만, 누군가가 보살펴주면 될 것 아닌가? 그것도 삶에 있어 중요한 공부인데. 밤 11시까지 학원에서 무엇인가 달달 외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공부가 아닐까?

시대는 바뀌고 있지만, 옛 것이 버릴 것만은 아닌 듯하다. 뇌과학의 최신 이론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니 역설적이라고나 할까?

<이 기사는 한국일보 12월 11일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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