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걷기







토실토실 밤송이 따라 걷노라면 고갯길 붉은 노을 손짓하네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규는 붉은 물이 들었다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서정주 ‘추일미음(秋日微吟)’ 전문》

지리산 엄지발가락에 노란 물이 들었다. 새끼발가락엔 살짝 빨간 물이 배었다. 산자락 다랑이 논이 호박색으로 익었다. 산동네 지붕마다 붉은 고추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마당 귀퉁이엔 접시꽃(촉규·蜀葵)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맨드라미꽃 닭 벼슬도 농부 얼굴처럼 검붉다. 봉숭아 채송화 작약 달리아 코스모스 깨꽃….

늙은 호박이 탱자나무 울타리마다 가부좌를 틀고 있다. 돌담 너머 주렁주렁 감과 대추가 다발로 매달렸다. 호두나무를 흔들면 후두둑 머리 위로 호두가 떨어진다. 밤송이가 통통하게 살이 뱄다. 석류가 살짝 벌어졌다. 돌덩이 같은 돌배가 은근슬쩍 물렁해졌다. 머루 다래가 익고, 어름이 대롱거리고, 개암을 깨물면 입 안 가득 깨소금 냄새….

지리산 둘레 길은 요즘 ‘밥 안 먹어도 배부른’ 길이다. 맑은 햇살이 온갖 열매를 데쳐 맛이 들게 하고, 선선한 바람은 곡식을 버무려 여물게 한다.

지리산 둘레는 모두 800여 리(약 320km). 3개 도(전남 경남 전북), 5개 시군(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 16개 읍면, 100여 개 마을을 거친다. 숲길(43.8%) 농로(20.8%) 마을고샅길(19.9%) 임도(14%) 도로(1.4%) 논둑길 밭둑길 고갯길 강변길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약 232시간(시속 1.3km) 걸린다. 하루 10km씩 가면 약 32.5일 걸리는 셈. 때론 낮은 곳(구례 토지·해발 50m)을 걷기도 하고, 때론 산꼭대기(하동 악양 형제봉·해발 1100m)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아직 둘레 길이 모두 이어진 것은 아니다. 5월 1, 2구간 21km(전북 남원 산내면 매동마을∼경남 함양 휴천면 세동마을)가 겨우 첫선을 보였을 뿐이다. 2011년쯤 돼야 둘레 잇기가 모두 마무리될 예정. 그때야 비로소 아무 곳에서나 출발해 휘휘 지리산자락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매동∼금계마을 ‘다랭이 길’ 쉬엄쉬엄 가도 5시간

1구간(전북 남원 매동마을∼경남 함양 금계마을, 약 10.68km)은 ‘외갓집 가는 길’이다. 산비탈 계단식 다랑이 논이 반 하늘에 걸려 있다. 이곳 사람들은 “다랭이 논”이라고 말한다. 둘레 길을 잇고 있는 ‘사단법인 숲길’에선 아예 ‘다랭이 길’로 이름을 붙였다. 느릿느릿 나무늘보처럼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숲길 논둑 밭둑길 농로가 대부분이다. 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길가엔 조 수수 콩 깨 등 온갖 곡식이 익고 있다. 숲길 가엔 도라지 꽃, 며느리밥풀 꽃, 물봉선 꽃, 칡꽃, 구절초 꽃, 용담 꽃 천지다. 물까치, 박새, 딱새도 뭐가 그리 바쁜지 끊임없이 수선댄다. 저 멀리 지리산 반야봉, 형제봉, 제석봉, 천왕봉, 상봉이 늙은 소처럼 웅크린 채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다.

다랑이 논은 상황마을부터 시작된다. 키 작은 산 나락이 노랗게 물들었다. 일하는 늙은 농부의 구부정한 등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저 많은 곡식과 과실을 언제 다 거둘까?

등구재(登龜·해발 700m·매동마을에서 5.5km)는 남원 상황마을과 경남 창원마을을 잇는 고갯길이다. 두 마을 사이 가마 타고 시집갔던 길이다. 거북 등을 닮아 그렇게 불렀다. 창원마을 사람들이 남원 인월장을 본 뒤 다시 등구재에 다다를 즈음, 서쪽 지리산 만복대엔 노을이 붉게 타오른다. 때마침 동쪽 법화산 마루엔 둥근 달이 두둥실 떠오른다. 바로 이 고갯길에서 붉은 노을과 눈부신 달빛이 황홀하게 어우러지는 것이다.

창원마을 동구 마루엔 500살 먹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길손을 반긴다. 참 곱게도 늙었다. 느티나무 아래서 배낭을 베개 삼아 한숨 늘어지게 자고 있으면, 산들바람이 솔솔 얼굴을 간질인다. 이 세상 그 어느 부자 안 부럽다.

2구간(경남 함양 마천 의중마을∼휴천 세동마을, 10.11km)은 ‘산사람 길’이다. 빨치산들이 다녔던 길이다. 부근엔 국군과 경찰의 공비토벌 길도 있다. 시누대숲이 훌쩍 크다. 그만큼 만만치 않다. 5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벽송사(해발 600m) 올라가는 길은 그렇다 해도, 그 위 해발 900m 지점(매동마을에서 15.7km)까지 오를 때는 숨이 벅차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의상능선을 지나 대남문∼대성문∼대동문∼우이동 계곡으로 빠지는 코스 정도로 보면 된다.

사단법인 숲길의 조사원 박무열(40) 씨는 “진짜 빨치산 길은 벽송사 뒤쪽 너머로 한참 더 들어가야 한다. 이 길은 그 들머리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여성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1933∼2004)이 한때 숨어 살았던 선녀굴은 3∼4km 더 안쪽에 있다”고 말했다.

벽송사는 6·25전쟁 때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쓰였던 절. 일제강점기 초기에 만든 2개의 나무 장승이 너무 늙어 비각 속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사람이나 장승이나 100년 살기 힘들다. 퉁방울눈에 각지고 울퉁불퉁한 얼굴이 보면 볼수록 익살스럽다.

송대∼세동마을 길은 임도 코스다. 터덜터덜 내리막이 가팔라 영 길 맛이 안 난다. 중간 송전마을에 있는 400년 소나무 바위정자가 그래도 마음을 달래준다. 발 아래 엄천강과 용유담이 한눈에 보인다.

소박한 인정-투박한 웅장함에 발걸음 가뿐

소설 ‘소서노’ ‘대조영’의 작가 이기담(44) 씨는 “난생 처음 지리산에 와봤다. 지리산 속에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보다 그냥 산봉우리를 쭉 보면서 걷는 게 너무 좋았다. 걷는 동안 내내 지리산의 투박한 웅장함이 몸에 젖어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경기 성남의 박병직(70) 씨는 “만보계를 보니 딱 3만5600걸음 걸었다. 평상시 산행에선 많아야 1만5000걸음이었는데 두 배가 넘었다. 하지만 주위 경관이 좋아서 그런지 용케 끝까지 해냈다. 기분이 뿌듯하고 좋다. 얼마 전부터 승용차를 없애버리고,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는데 그 효과를 보는 것 같다”며 웃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모임(http://cafe.daum.net/sankang)의 고혜경(47) 씨는 “출발 지점인 매동마을에서 민박을 했는데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정말 소박하고 인정이 많으셔서 가슴이 뭉클했다. 직접 지어주신 음식들도 정말 맛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던 금싸라기 같은 밤하늘의 별들, 반짝거리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도 숨이 막혔다. 다만 2구간이 생각보다 많이 가파르고 단조로워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리산자락 마을엔 곳곳에 부처와 보살들이 살고 있다. 칠순 넘은 노인들이 늙은 느티나무처럼 살고 있다. 자식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고 누렁이와 백구만 남았다. 할머니들은 노고단 산신할미처럼 길손들에게 자꾸만 뭘 주지 못해 애가 탄다. 목마르다며 텃밭에서 오이도 뚝 따서 주고, 수박도 쩍 잘라 나눠준다. 느티나무 한 그루의 나뭇잎은 무려 10만여 장. 할머니들의 사랑은 그보다 더 무성하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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