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 술집 시인통신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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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꾼 시인도, ‘야한’ 교수님도 단골

언젠가는 떠나야 했다.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건물 관리인은 진저리를 쳤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뤄지는 ‘심야 퍼포먼스’. 생쇼 불쇼에 난리 부르스…. 장안의 도깨비들이 벌이는 난장 된장 고추장 천장 마룻장 아수라장….

관리인은 “제발 떠나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또 시통 식구들이 나섰다. 순식간에 ‘시발연(시인통신발전연구회)’이 만들어졌다. 우선 단골 외상꾼들이 서둘러 외상값부터 갚았다. 화가들은 앞 다퉈 그림을 기증했다. 시인 소설가들은 원고료 일부를 떼어 내놓았다. 건축가는 새로 이사 가는 시통 내부 실내장식을 맡았다. 이렇게 300여명으로부터 비록 적지만 소중한 성금이 모아졌다. 주인 한 씨는 그동안 피같이 모은 돈과 일부 빚을 낸 목돈에 시발연의 성금을 보태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92년 5월 2일 밤. 시통 식구들이 한밤중 모두 나와 난데없는 ‘길거리 퍼포먼스’를 벌였다. 저마다 손엔 낙서판, 술잔, 나무의자, 접시, 잡지 사상계 등 온갖 잡동사니가 들려 있었다. 시통 이삿날이었다. 새 보금자리는 종로1가 농협과 무과수 제과 뒤편(현 르메이에르 자리). 1층만 무려 10평, 2층까지 합하면 20평이나 됐다. 하루아침에 오막살이에서 대궐 같은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건축가 이홍기는 건물 여기저기 비틀어지고 구멍 난 데를 말끔히 손질했다. 화가 강찬모는 한 쪽 벽면을 멋들어진 그림으로 채웠다.

그해 10월 시통 식구들이 또 다시 한데 모였다. 이번엔 서울 서초동 법원 청사 앞. 모두 입에 ‘×자가 그어진 마스크’를 썼다. 또 다른 시통 식구 마광수 교수를 위한 모임이었다. 마 교수는 소설 ‘즐거운 사라’로 인해 청하출판사 사장이면서 시인인 장석주와 함께 검찰에 구속된 상태였다. 죄명은 음란물 제작 배포 혐의. 그날 시통 식구들은 연세대학생 20여명, 청하출판사 사람들 등 50여명과 함께 ‘표현자유 수호’를 외쳤다.

술좌석의 마 교수는 범생이 그 자체였다. 거의 말이 없었다. 어쩌다 우스개 말이 나오면 겨우 희미하게 웃었다. 일부러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였다. 늘 뭔가 긴장하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아이고 말도 말아요. 그 마 교수 완전 색시요, 색시. 언젠가 아가씨들과 악수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아 글쎄, 손이 파르르 떨리더라니까. 도대체 그런 마 교수가 왜 음란이니 뭐니 해서 유명하게 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느 날 감옥생활을 끝낸 마 교수가 다시 시통을 찾았다. 들어갈 때보다 오히려 밝고 더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시통 식구들 덕택에 잘 지냈습니다. 고마워요. 나 거기서 많이 반성하고 공부했습니다.

그는 노래도 불렀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를 걸어갈 때, 쇼윈도 글라스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18번은 ‘명동 엘레지’였다. 시통 식구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누군가 그에게 짓궂게 물었다.

“마 교수, 지금도 손톱 뾰족한 여자와 긴 생머리에 뾰족구두 신은 여자를 보면 미칩니까?” 마 교수는 씩 한 번 웃더니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이구, 이젠 자신 없어요, 무서워요.” 그 순간 “으하하하” 모두가 발을 구르며,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꽃등불 켜지면, 금세 어울리고 친구 되고

시통은 넓어지면서 한결 넉넉해졌다. 땅거미 어스름 내려, 시통의 꽃등불이 켜지면 ‘어린애 같은 어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하룻밤 많게는 120명 가까이 들끓었다. 100명 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시장바닥처럼 늘 시끌벅적 북적였다. 하지만 빈자리가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자연스럽게 합석하고, 어느 순간 한 식구가 돼버렸다. 그러다가 때론 싸우기도 하지만, 금세 어깨동무 하고,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시통은 어느새 3세대를 맞고 있었다. 초창기 출범할 때 문인 예술가들이 1세대였다면, 84년 한 씨가 새  주인으로 자리 잡을 무렵엔 지사적 주당들이 2세대 주역으로 등장했다. 농협 뒤로 이사한 후엔, 각 언론사 노조 팀, 당시 막 뜨고 있던 신규광고회사 팀, 386운동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들과 같이 왔던 샐러리맨들도 적잖이 합류했다. 바야흐로 세상은 휙휙 변하고 있었다.

시통에선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가 곧잘 열렸다. 각종 명목의 기념회 같은 것도 심심찮게 펼쳐졌다. 그 즈음 산삼 심는 패거리인 ‘농심마니 패’들이 시통을 아지트로 삼아 한세상을 희롱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 산 저 산을 누비며 어린 묘삼을 심고 다녔다. 나중에 누가 캐 먹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우리 백성 중 누군가가 캐먹을 것 아니냐는 거였다. 어느 땐 백두산까지 날아가서 삼을 심고 오기도 했다. 이들이 자나 깨나 부르는 노래는 ‘농심마니의 아침’이었다. 

‘농심마니 잘 있느냐/ 지난 밤 꿈속에서/ 산신령이 하신 말씀 귓가에 새롭구나/ 산삼은 이 땅에 뿌리요 배달의 정기/ 조선은 삼산 밭 산삼을 심자/ 삼 심자 심봤다 이 나라 이 땅에/ 이 나라 이 땅에.’

산악인 박인식(대장), 산처녀 남난희 김경희, 작곡가 한돌, 시인 김홍성, 소설가 최성각, 사진작가 황상보 안성일, 연극연출가 최유진, 번역가 이상영, 칠보공예가 물빛, 작곡가 변규백, 자연보호운동가 이덕용, 여행가 박세경, 치과의사 김윤만, 기자 이평식, 또 다른 모임 풍패의 김응하 박흥식 윤명철 등이 그 멤버였다. 하지만 여기에 김종철 논설위원, 재야 기호논리학자 신성준, 화가 서영준,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 이두엽, 화가 박권수, 배우 이성룡, 치과의사 이승건, 시인 권경업, 영화감독 이 만 이미례, 가수 이연실, 염색공예가 정윤숙, 장승조각가 신명덕 등이 시도 때도 없이 범벅이 되어 어우러졌다.

각 언론사 노조 팀들도 북적였다. 동아일보 김광원, 황의봉 위원장은 밤이 이슥해지면, 노조원들과 함께 몰려와 목을 축였다.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도 단골멤버였다. 그는 대단한 술꾼이었다. 아침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마셔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후배들이 횡설수설에 버릇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여도 전혀 미동 없이 묵묵히 들었다. 그는 말이 거의 없었지만, 남의 말 듣는 데는 천하도사였다. 결국 마지막 한 사람까지 코 박고 쓰러지면, 그때서야 조용히 일어났다.

권 위원장은 2002년 민노당 대통령후보로 나서 뜻있는 선전을 펼쳤다. 대선이 끝난 후, 그는 시통에서 그의 멤버들과 함께 대선 뒤풀이를 가졌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어느 언론사 후배가 말했다. “만약 투표가 아닌 술로 했다면, 권 선배가 대통령 되는 건 식은 죽 먹기 일 텐데….”    

외상장부 들여다보고 후배 술값 갚아주는 선배도 많았다. 동아일보 이도성 기자는 ‘어느 편집부 후배 술값으로 쓰라’며 원고료를 통째로 맡겨놓곤 했다. 한국일보 김종우 기자도 가난한 후배들 술값 대느라 바빴다. 우먼센스 조대웅 국장은 술꾼 후배의 적지 않은 외상을 갚아주면서 “그 인간 술 먹으면 큰 일 나요”했다가도, 한두 잔 들어가면 “술꾼이 술을 못 마시면 어떡합니까? 다음엔 조금씩만 주세요. 내가 갚아줄 게요”라고 말했다. 참으로 따듯한 선배들이었다.

“아니 이런 곳에, 이런 묘한 데가 있나?”

시인 소설가 발길이 줄었다지만, 예술인들의 발길은 여전했다. 어느 날, 철학자 황필호 교수가 “아니 이런 곳에, 이런 묘한 데가 있었나?”며 나타났다. 구인환 교수의 안내로 시통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구 교수는 ‘낭만작가’이기도 했다. 흥이 나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빼들고 멋들어진 춤을 추며 아리랑을 불렀다. “우리 집 시어머니는 야속도 하지, 그 잘난 것 하나 낳아줬다고 날 들들 볶네~” 이렇게 선창하면, 황 교수나 소설가 오인문 이동희 김정례 등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며 후렴을 불렀다. 이어 구 교수의 선창이 또 이어졌다. “우리집 서방님은 야속도 하지, 그 잘난 것 하나 갖고서 날 못 살게 구네~”       

시인 노향림 박영하 장윤우, 문학평론가 신동한 윤병로, 소설가 윤후명 김병총 서종택 등도 이즈음 활발하게 시통을 드나들었다. 그 중 하나였던 문학평론가 이명재는 당시 시통 분위기를 회고했다. 

“농협 뒤에 쪽문 열면 도심에 자리한 문인 사랑방이 있다. 90년대 초 우연히 작가 구인환 선생, 오인문 사백과 우연히 들렀다가 알게 됐다. 시골 주막집 분위기라 정겨웠다. 아늑한 문인사랑방에 온 듯한 안온감을 준다. 어둑신한 나무층계로 퉁퉁 소리 나는 발자국 따라 2층에 오르면, 완전히 동네 친구 집에 찾아온 기분이다. 퇴색된 천자문의 한지로 도배된, 벽 군데군데에 걸린 거친 묵화그림이며, 서투른 붓글씨로 쓰인 글귀들 역시 옛날 시골 주막 같은 정취를 자아낸다. 밤늦게까지 문학담과 정담들이 무르익다보면 실내분위기도 달아오른다. 맞은 편 직장인 듯한 남녀 젊은이들이 우리 테이블로 두부김치 한 접시와 맥주 한 두병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은 이날 우리 모임 모습을 찰칵 카메라에 담았다가 다음에 전해주곤 한다.”

예전만 못하지만 화가들도 종종 나타났다. 200일 넘게 그림만 그리다가 갑자기 시통에 들러 몇날 며칠 술을 쏟아 붓는 화가도 있었다. 적색벽돌과 나무 문, 삐걱거리는 목조고가. 목각으로 된 작은 간판. 마른 북어에 마요네즈, 마른 멸치 땅콩. 계란말이….

글쟁이들의 만취강의는 여전했다. 그들의 언어는 남달랐다. 일상의 언어들을 걸러내어, 다시 구슬에 꿰어 내놓았다. 오가는 말들마다 신선하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시통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토론장이었다. 야전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93년 주인 한귀남 씨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문학계간지 ‘포스트모던’에 시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이 된 것이다. 시는 ‘나의 토방’ 등 4편. 시통에서 시인들과 10년 부대끼면서 얻은 선물이었다. 한 씨는 “어느 날 ‘내가 썩어가는 구나’하는 생각이 덜컥 들어, 노트에 끼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게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시통의 시인 술꾼들이 한 씨의 습작노트를 빼앗아 통째로 잡지사에 보낸 것이다. 한 씨는 내친 김에 2000년 계간지 ‘지구문학’에 소설 ‘피맛골에 부는 바람’이 실리면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여고시절(서울 동명여고) 문학의 꿈을 이룬 것이다.

시통 이사 10년째인 2002년 봄. 외상 장부가 1000여명에 가까워졌다. 어느 시인은 “외상값 대신 시 2편 써줄 테니 아무 잡지사나 갖다 주고 원고료 받으라”며 껄껄댔다. 화가들은 그림 한두 점 그려서 슬며시 내밀었다.

시인의 골목은 죽고, 이제 어디서 우나?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시통엔 김재곤 논설위원만 가끔 눈물을 흘리다가 가곤 했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맛길도 뭉텅뭉텅 허리가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교보빌딩에서 이어지는 피맛길 두 번째 골목인 시통 골목은 재개발에 들어갔다. 무과수제과, 조방낙지, 만나회관, 부산뽈데기, 천냥집, 아산한우방이 사라졌다. 2003년 겨울, 시통도 인사동으로 떠났다. 인사동 시통(2004~2005 겨울)은 ‘갓 쓰고 자전거 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층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못하고 뱅뱅 겉돌았다. 시통 식구들도 한두 번 가보곤 고개를 저었다.

2004년 11월 시통은 다시 청진동으로 돌아왔다. 청진동 해장국집(청진옥) 바로 뒷골목이었다. 그 골목은 교보빌딩으로부터 이어지는 피맛길 세 번째 골목이었다. 중국집 신승관, 한정식집 한일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그곳도 재개발에 들어갔다.

2008년 7월31일 시인통신은 결국 문을 닫았다. 피맛길엔 더 이상 어디 발붙일 데가 없었다. 삐까번쩍 새로 올라간 건물은 집세가 엄청났다. 그걸 맞추기 위해선 술값이 카페수준은 돼야 했다. 그건 시통 식구들에게 오지 마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피맛길은 원래 서민들의 길이다. 말을 타고 종로 큰길을 지나는 벼슬아치들을 피해(避馬) 다닌 길이다. 거들먹거리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싫었던 것이다. 80년대는 최루탄을 피해 들어왔던 피연길(避煙路)이었다.

조선 후기엔 ‘팔뚝거리’라고도 불렸다. 이 부근에 살던 양반들이 먹고살기 위해 해장국 장사를 했는데, 그래도 양반아녀자들이라 얼굴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휘장 뒤에서 두 팔뚝만 내놓으면서 밥상을 내밀었다. 그 이후 ‘팔뚝거리, 팔뚝동네’라고 했다.

시통의 큰누나 주인 한 씨는 말한다. “고난의 시기엔 예술가들이 유달리 더 가슴앓이를 많이 한다. 지난 세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자니 나마저 껍데기가 열 번 쯤은 벗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니 고통도 힘이었다. 그 땐 누가 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지 다투다가, 끝내는 서로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린 격정의 시절이었다. 돈도 없던 추운 시절에 광기로 터질 듯한 남자들이 시통을 찾아왔다. 난 한 번도 장사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라면도 끓여주고 하면서, 식구처럼 그렇게 부대끼며 그 엄혹한 시절을 견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암 박지원은 1771년 서른네 살 때 과거를 때려치웠다.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조선 사람의 눈으로 조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사나이 대장부가 닭 벼슬보다 못한 벼슬 따위는 해서 뭐 하는가”라며 협객 백동수(1743~1816)를 길잡이로 삼아 전국을 떠돌았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1741~1793), 이서구(1754~1825)도 함께 했다. 이때 이덕무가 서른, 백동수가 스물여덟, 이서구가 불과 열일곱 살이었다. 이들은 개성송도-평양-천마산-묘향산-속리산-가야산-충북 단양 등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꺼이꺼이 질펀하게 울 만한 곳을 찾았다.

“조선 천지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황해도 장연의 금 모래밭을 거닐면서 원 없이 울어볼 만하다.”  

  80년대 이후 시통을 수없이 들락거렸던, 그 열혈아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울고 있을까? 87년 6월 그 뜨거웠던 여름, 광화문 일대에서 최루탄에 맞서 싸우다가, 밤 이슥해 시통에 들어서던, 그 자랑스러운 ‘해방전사’들은 앞으로 어디서 마음껏 울음을 터트릴까?

시통이 사라진 피맛길은 이제 ‘죽은 시인의 골목’이 되었다.    

<그 때 그 ‘시통식구들’>

 ▼시인=강경훈 강만식 강태열 권경업 권일송 김규동 김선유 김송배 김신용 김여옥 김영철 김정웅 김종천 김춘랑  김하중 김홍성 마종하 민 영 박건삼 박경용 박중식 박태진 백옥실 서 벌 송길자 송동권 송동호 송재룡 송재율 송 현 신경림 신세훈 신순애 신현배 안도선 안만식 안익수 오영수 우영창 이규헌 이규호 이근배 이도윤 이상범 이생진 이수화 이승철 이용범 이창년 이 탄 이태근 이형덕 임문혁 장윤우 전종목 전연욱 정공채 조재훈 조해인 지성찬 진복희 진을주 최승호 최정자 하득용 한분순 허유 허홍구
 ▼소설가=구인환 김대수 김명조 김병총 김우영 김영현 김석태 김송배 김정례 마광수 박상우 송우혜 서해성 심명석 안장환 오인문 오성찬 엄광용 원형갑 유재용 윤후명 이동철 이동희 이세기 이완수 이원파 이외수 이정림 이호철 전범수 전상국 정건섭 정신재 정연희 정을병 조동수 조해인 최강록 천금성 표성흠 하성찬 하일지 하창수
 ▼수필가 김시원 정목일
 ▼문학평론가=신동한 이유식 윤병로 장백일 정신재 최동호 최 학
 ▼아동문학가=박홍근 이상교 신현득 신형건
 ▼만화가=김 삼 나대로 한희작
 ▼화가=강용대 강찬모 강행복 김문조 김영미 박광호 박권수 박상희 백경학 서영준 서정태 손상기 송 똥 심문섭 이목일 전강호 전수창 정복수 최낙경
 ▼언론인=구본갑 국흥주 권영길 김광원 김동철 금동혁 김 성 김재곤 김종구 김종철 김중배 김지용 김지완 김태홍 김회평 문학진 박관일 박병서 안기석 엄광용 오광수 원용강 이관기 이도성 이세일 이승호 이점석 이평식 임형균 유보상 윤승용 손문상 신효정 정출도 천상기 최영록 황제연 허승호
 ▼사진작가=김성수 김수영 이남수 안성일 조준호 황상보
 ▼기타=재야논리학자 신성준, 산악인 박인식, 남난희, 작곡가 한돌, 연극연출가 최유진, 연극인 이성룡, 영화감독 한옥희 이미례 이 만,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 이두엽, 방송작가 이은집, 철학박사 황필호, 전위예술가 무세중, 장승조각가 김명덕, 치과의사 김윤만 이승건, 여행가 박세경, 작곡가 변규백, 자연보호운동가 이덕용, 번역가 김대웅 이상영, 가수 이연실, 염색공예가 정윤숙, 사람과 산 홍석하, 그래픽디자이너 이관열, 다큐멘터리 작가 홍하상, 극작가 유보상, 민속학자 심우성, 문학통신 이지룡, 추리작가 정건섭, 교사 안철상, 사업가 김명성 이상일, 자유기고가 공정희, 해냄출판사 송영석,방송인 김경원, 출판인 이정한, 북한산 지킴이 차준엽, 원강스님, 산하출판사 소병훈, 건축업자 이홍기, 영화평론가 한옥희, 인도여행사 정윤숙, 우리말갈래사전 박용수, 교수 이길주 서상문, 옹기쟁이 김용문 , 변호사 김광정 박원순 윤 학, 여행가 송일봉, PD 표재순, 문학박사 신철균, 치과의사 김영환, 새마을 문고 강만식, 영국신사 김갑석, 교보생명 민 욱과 그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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