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친구와 나눈 말, 가족이 꺼내면 욱할까

무의식 인정하고 ‘환기효과’로 오순도순 가능

직장인 박연경씨(여·28·서울시 동작구 신대방동)는 추석 때 고향인

전북 군산에 내려가서 친척들로부터 질문 세례를 받기가 벌써부터 두렵다. 관심과

애정을 갖고 하는 질문이겠지만 듣는 사람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대충 얼버무려도

연봉 액수를 꼬치꼬치 캐묻는 작은 어머니,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의 종교까지

확인하는 외삼촌 등은 기피 대상 1호다.

전업 주부 최진옥씨(42·경기 수원시 인계동)도 명절이 고달프다. 차례상

준비하랴, 손님 맞이하랴 몸이 힘든 것은 차라리 견딜만 하다. 하지만 뿌리 깊은

고부갈등에 요즘엔 직장 생활하는 손아래 동서에게 치인다는 열등감까지 겹쳐 스트레스가

심하다.

즐거워야 하는 명절이지만 속내를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다. 형제들은

병든 부모님의 간병비 문제로 얼굴을 붉히고 만년 취업 준비생은 친척들의 걱정을

가장한 간섭을 피해 밖으로 돌 궁리만 한다.

가족이 모이면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명절에 가족 간에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은

끝없는 가사 노동, 집안의 대소사 의논, 불필요한 간섭 등이 있다.

갈등을 없앨 수는 없지만 갈등의 실체를 파악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면 스트레스를

줄이고 가족 간의 마찰을 완화시킬 수 있다.

가족 갈등은 무의식의 산물, 지혜롭게 대처하자

명절 때 다른 가족으로부터 신상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왜 ‘욱’하는 기분이

들까. 예를 들면경제 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요즘 수입이 괜찮느냐’라는 질문을

친구에게 받았을 때 보다 친척에게 받았을 때 마음이 더 상한다.

서울대병원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이를 “뇌 속 무의식 세계에 숨어있던 경험이

의식의 세계로 올라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의 뇌에는 호흡과 온도조절 등을 맡는 ‘원뇌’, 감정처리를 담당하는 ‘가장자리계’,

이성적 판단을 맡는 ‘대뇌피질’ 으로 구성돼있다. 이중 가장자리계의 영역인 무의식

속에는 의식의 영역에 남겨 놓으면 살아가는 데 힘든 요소들이 억압돼 있다. 이런

요소들은 주로 어릴 적 가족 관계에서 형성된다. 명절에 온 가족이 두루 모인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이 그 무의식을 자극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면 사소한

것일 지라도 무의식의 자기애가 증폭돼 갈등이 생길 수 있다.

미국의 심리상담가 조레인 존스 박사는 “갈등 상황에서 자기보호 본능이 상처받으면

가장자리계가 활성화하고 이성적 판단이 마비돼 감정싸움으로 비화하곤 한다”고

설명했다.

가족들은 남보다 친밀하다는 생각에 남에게는 조심스러운 질문도 가족에게는 쉽게

던지는 경향이 있다. 은근한 경쟁 의식도 있다.

따라서 가까운 가족이라 할지라도 민감한 질문을 자제하고 그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도 ‘아, 내 무의식이 상처를 받았구나’라고 여기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전홍진 교수는 “가족과 대화 할때는 심각한 이야기보다는

주위사람들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흥미있는 화제를 골라야 한다”며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를 너무 곱씹어서 해석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고 대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상처를 덜 받는다”고 조언했다.

가사 분배는 필수, 갈등 대상이 아닌 제 3자와의 수다도 도움

가족 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에는 명절증후군이 있다. 명절을 기피하거나

두려워하는 현상을 흔히 명절증후군이라고 하지만 사실 명절증후군이라는 병명은

없다. 증세만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명절증후군은 명절이 다가오면서 과거에 차례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경험한 심한 육체적인 피로감, 시댁과의 갈등, 친정에 대한 소홀, 차례를 준비하거나

지내는 과정 중에 느끼는 성차별 등이 대한 정서적인 부담감이 다시 생각나면서 긴장,

분노, 우울감을 느끼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최근에는 주부뿐만 아니라 며느리 눈치를 보는 시어머니, 부모 부양에 부담을

느끼는 장남,장기 취업 준비생, 미혼 남녀 등에게서도 명절증후군이 나타나 갈등을

일으킨다.

전홍진 교수는 “명절증후군이 심해져 불면증, 불안, 초조, 의욕의 저하, 대인관계

기피 등의 증상까지 나타난다면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명절증후군으로 인한 갈등을 줄이는 것에 ‘환기효과(ventilation)’가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환기효과는 갈등이 있는 대상을 만나기 전에 제3자에게 갈등상황을 털어놓음으로써

갈등상황에 대한 사전 적응을 하는 과정을 말한다. 창문을 열어 탁한 공기를 맑은

공기로 바꾸듯이 갈등상황을 그 상황과 아무런 이해 관계없는 이들과 대화하면서

미리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며 수다를 떨거나 정신과 상담

역시 이러한 환기효과를 심화하는 것이다.

환기효과를 스스로에게 적용했다면 이후 가족 서로간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위한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다. 무조건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서로의 입장에서 느낀

바를 공유하고, 자신만의 입장을 고집하기 보다는 개선시키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동시에 가치관 차이를 줄여줄 수 있는 사회적 인식변화도 요구된다.

몸이 피곤하고 환경이 바뀌면 가장자리계가 과잉활성화해 작은 일에도 흥분할

수 있다. 따라서 신체적으로는 음식을 할 때 자세를 편안하게 하고 잠깐씩이라도

적절한 휴식을 하도록 한다. 자주 스트레칭을 해서 목과 어깨의 긴장을 풀어주고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데 도움이 된다.

을지병원 가정의학과 권길영 교수는 “가족 분위기가 주부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가사 노동을 분배하고 처가에도 일찍 가는 등 주부를 배려하는 자세가

가족 갈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며 “가족 간의 갈등은 스스로의 마음을 조절하고

가족들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노력을 통해 서로 개선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법”이라고

말했다.

    소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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