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사망’ 믿습니까?

또 낚였다. 포털 사이트를 주유하다 한 기사에 걸음을 멈췄다.

‘선풍기를

틀고 자다 죽는 진짜 이유는?’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서울에서 열린 한 폭염 관련

세미나에서 미국의 대학교수가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자다가 숨지는 것은 심장마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를 켜켜이 살펴보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우선, 이 주장을 한 사람이

의대 교수가 아니라 지리학과 교수였다. 자신이 전공하지 않는 분야에 대해 주장한

것이다. 이 기사는 또 미국 환경보호국(EPA)이 “선풍기를 창문이나 방문 등 외부와

공기가 통하는 곳에 설치해야 하고 밀폐된 방에서 오래 사용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겁을 주고 있다.

마치 EPA가 ‘선풍기 사망’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으로 읽히지만 ‘선풍기 사망’은

지구촌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는 이것을 ‘대한민국의

미신’(South Korean Urban Legend)으로 규정하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한국 정부와 언론이 선풍기 사망을 기정사실로 믿고 있지만,

선풍기를 사용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사고가 없으며 의학적으로도 선풍기 사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선풍기가 일사병, 열사병을 방지할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PA가 폭염이 왔을 때 밀폐된 방에서 선풍기를 오래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선풍기만으로는 열사병을 방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서는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선풍기 사망사고를 인정하고 예방 캠페인을 벌이는 사실을 흥미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국내 의학계에서는 대체로 선풍기 사망이 가능하다는 ‘소수설’과 턱도 없다는

‘다수설’이 대립하고 있다. 소수설은 산소 부족으로 인한 질식, 얼굴의 호흡 방해,

저체온증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글쎄…’에 가깝다.

방에서 선풍기를 틀어 놓는다고 산소가 줄어들지 않으며 얼굴의 호흡이 방해 받아

숨진다면 승용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숨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고는

없었다.

‘소수설 중 다수설’이 저체온증 유발설이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내과학회지’에

소개된 논문에 따르면 더운 방에서 선풍기를 켜놓으면 잠시 피부의 증발 현상으로

체온이 내려가지만, 곧 선풍기의 과열로 인해 방 온도와 체온이 다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생리학의 세계적 대가인 캐나다 매니토바대 고드 기스브레흐트 교수는 “저체온증으로

숨지려면 체온이 10도 이상 내려가서 28도 이하여야 하지만 선풍기를 틀어 놓는다고

하룻밤에 체온이 2, 3도 이상 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과학적으로는 알코올 중독이나 심장병, 뇌중풍 등으로 사망했는데 우연히 선풍기가

켜져 있었다는 설명이 더 타당하다. 미국의 한 의대 교수는 “한국인에게는 질병공포증(Pathophobia)이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황당한 믿음이 기정사실화됐을까? 선풍기 사망의 소수설은 꼼꼼히

따져보지 않으면 그럴싸하게 들린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선풍기 바람을 오래 쐬었을

때의 불쾌감이 사망설로까지 증폭됐을 것이다.

무엇보다 믿음이 진실이나 근거를 압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근저에 깔려 있을 것이다.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다투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분위기가 온갖

낭설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칼럼은 한국일보 7월 31일자 ‘삶과 문화’에 게재됐던 것입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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