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과 귀가 거친 사회

腦의학으로는 유아기 상태

말이 험하다. 거칠다. 보지 않아야지 하면서도 눈길이 닿는 인터넷 댓글에 가슴이

베인다. 정부를 욕하는 쪽이나, 욕한다고 욕하는 쪽이나 육두문자 제조공장이다.

공자는 귀가 순해져 웬만한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순(耳順)을 지나 마음대로

움직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거늘, 이순이 되기에도 벅찬 세상이다.

헌데, 이순은 있어도 구순(口順)이라는 말은 왜 없을까?

의학적으로 구순이 있다면 이것과 이순의 영역은 가깝다. 뇌에서 말을 이해하는

‘베르니케 영역’과 말을 만드는 ‘베로카 영역’은 좌뇌 측두엽(관자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입과 귀의 물리적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그렇다면 왜 많은 한국인은 가까이에 있는 베로카, 베르니케 영역이 함께 흥분한

상태일까?

대학시절 한 노(老)교수의 말이 실마리를 던져준다.

당시 강의실 밖 스피커에서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 교수는

“참여해야겠지요. 수업은 이것으로…”하며 책을 덮었다. 이어 천장을 바라보더니

“민주주의를 위한다면서 말은 어쩌면 저리도 비민주적일까? 하기야 뱃속에서부터

민주주의를 모르고 자랐으니…”하고 쓸쓸히 강의실 문을 나섰다. 필자는 그 말의

의미를 10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순한 말에서 나온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선진국에서는 수업 때 토론을

장려한다. 학생은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흥분해서 남을 원색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남을 존중하는 것이 비난하는 것보다 설득하기에 훨씬 유리하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토론도 승부다. 필자는 한국 TV의 시사토론에서 주제가 늘

다른데도 편은 한결같은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필자만의 옥생각일까?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의 문 상인방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경구를 인용하며 “현자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배우는 자세를 유지하지만 우인(愚人)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갈파했는데,

정신의학적으로 일리가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자기편은 무조건 옳다고 우기고 다른

편에 저주를 퍼붓는 것을 정신이 아기의 사고유형으로 퇴행한 것으로 설명한다. 항상

그런 사람은 인격이 미성숙했다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 용어로는 동일화(同一化)와 투사(投射) 등으로 설명한다. 투사는 자신의

자아가 억누르고 있는 무의식의 열등한 부분을 남에게 떠넘기는 작업이다. 정부가

바뀌었는데 서로 하는 짓은 비슷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특히 무의식의

열등감은 집단 속에서 힘을 얻어 공격성을 띠기도 한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기자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대한민국 대표팀의 객관적

실력은 1무2패”라는 기사를 썼다가 자칭 축구팬들로부터 온갖 위협과 육두문자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의 예측이 정확히 맞았을 때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이들의

정신유형은 책임지지 않고 잊어버리는 아기같은 심보다.

그 기자는 50대의 나이에 이에 개의치 않고 정도(正道)를 묵묵히 가고 있으니

이순의 경지에 올랐다고나 할까? 하지만 가슴이 간장종지같이 작은 필자에게 이순은

아득한 경지이다. 덜 상처 받기 위해 대중의 구순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을까?

 

※이 칼럼은 한국일보 5월 29일자 ‘삶과 문화’에 게재됐던 것입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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