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컬레이터의 암묵지(暗默知)

관료적 계도 마인드와 비논리성을 버려야

아직도

출근길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 양쪽 벽에 붙은 포스터는 그대로다. 언론에서 두

줄 타기 캠페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와 칼럼이 잇따라 나오고 있고, 무엇보다도

그 누구도 그 포스터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있는데도.

필자의 회사 근처에 있는 지하철역에서는 시민 대부분이 두 줄로 에스컬레이터에

탄다. 이 까지만 보면 ‘두 줄 타기, 올바른 안전문화의 시작’이라는 포스터에 호응하는

듯 하다. 하지만 양쪽 모두에서 성큼성큼 오르내리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부는

서 있는 사람 사이로 지그재그로 간다. 더러 뛰기도 한다. 에스컬레이터가 30m 정도의

높이이기 때문에 아찔하기까지 하다.

언제부턴가 승강기안전관리원(승관원)과 서울메트로, 도시철도공사 등에서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일부 언론도 호응했다. 포스터는 “‘무지한

시민’은 잘 모르지만 ‘한 줄 타기’가 사고 주범”이라고 훈계하는 듯하다. 얼핏

보면 지당한 듯하지만 과연 그럴까. 필자는 이 캠페인이 시민의 ‘암묵지(暗黙知․Tacit

Knowledge)’를 무시한 대표적 탁상공론이어서 실패했다고 본다.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암묵지로 정착된 문화다.

암묵지는 경험으로 정착된 지혜를 뜻하는 철학용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후반

언론의 문제 제기와 시민단체 캠페인을 통해 확산됐으며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정착됐다. 서양의 암묵지였지만 합리성이 내재돼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빨리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지만 이 때에도 ‘안전’이

강조됐다. 두 줄로 타면 바쁜 사람이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며 다른 사람과 부딪혀

사고가 난다는 점이 반영됐던 것이다.

안전을 위해 급정거에 대비해 핸드레일을 꼭 잡고 두 줄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은

극히 이상적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1초라도 빨리 가야 할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출퇴근길일수록 이런 사람은 더 많이 눈에 띈다. 더구나 한국은

행인의 빠른 걸음걸이가 자랑거리였던 나라가 아닌가. 한 줄 타기는 안전이라는 바탕에

‘급한 사정’을 용인한 타협점인 셈이다. 우리보다 덜 바쁜 선진국에서도 한 줄

타기가 이런 사정에 암묵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에스컬레이터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모주망태나 어린이, 노인에겐 특히

아슬아슬한 곳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키워드는 안전의식, 이동, 급정거, 핸드레일

등이지 ‘줄’ 자체가 아니다. 시민들은 에스컬레이터가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주 급하지 않으면 핸드레일을 꼭 잡고 서 있는 것이 좋다.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는 것처럼 급한 경우는 생기므로, 그런 급한 사람을 위해 왼쪽을 비워둔다. 걸어

올라가는 사람도 핸드레일에 손을 올려놓고 급정거에 대비하면서 이동해야 한다.

그러면 안전사고의 위험은 격감한다. 사실 안전사고의 상당수는 에스컬레이터의 급정거

때문이다. 이때에도 두 줄 서기가 안전을 담보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한 줄이 두 줄에 비해 위험하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 논점 일탈의 오류에 해당한다.

일부에서는 “바쁘면 계단을 이용하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계단은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또 한 줄이 두 줄보다 위험하다면 양 쪽의 사고 변화를 에스컬레이터

대수 비율로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통계자료는 아직 보지 못했다. 승관원은 최근

에스컬레이터 사고가 급증했다고 했는데, 한 줄 타기가 원인이라면 1990년대 말부터

그랬어야 옳다. 승관원은 또 두 줄 타기 캠페인을 하니까 일정 기간 안전사고가 줄었다고

강변하는데, 두 줄 타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시간에 시민들이 좀더 경각심을 가졌기

때문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래서 시민의 관례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안전사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까지 하다.

승관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대부분의 나라에서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를 중단했다고

발표했다가, 네티즌들로부터 “배낭여행 때 선진국에서 한 줄 타기가 정착된 것을

보고 왔는데 웬 거짓말?”이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필자도 30여 개 국을 돌아다녔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가 암묵지로 정착돼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놓고 보면 ‘시민사회의 암묵적 합의’를 흩뜨리는 이런

일 외에 진짜 해야 할 일이 있다.

에너지를 절약하려고 에스컬레이터 중 올라가는 방향만 작동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관절은 계단을 내려갈 때 훨씬 무리한다. 관절염 환자에게 내려가는

계단은 고문에 가깝지만 오르는 것은 덜 고통스럽다. 반면 계단 오르기는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효과가 크므로 굳이 에스컬레이터를 정지시키려면 오르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또 선진국에서는 사람의 자연적 특성에 따라 양 쪽 에스컬레이터 중 오른쪽으로

오르내리도록 돼 있는데, 우리는 들쭉날쭉해서 여간 헷갈리지 않는다. 미국에서 온

지인이 그것 때문에 헷갈려서 사고가 날 뻔 했다고 하소연한 적도 있다.

우리나라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는 과학과 상식, 논리보다는 관료적 계도 마인드와

비논리성이 나란히 두 줄로 서 있는 듯해 씁쓸하다. 암묵지로 정착된 문화를 바꾸려면

온갖 상황에 대한 가정과 고려가 필요하다. 모든 정책에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상적인 것조차 쉽게 바꾸는 조령모개(朝令暮改)에 대해 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해 안타깝기만 하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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