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진료실 문고리가 두려워요”

제약사 영업사원 남상길 씨의 24시

1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A병원 2층 내과 진료실 앞.

검은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남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둘씩 짝을 지어 있는

사람, 큼지막한 쇼핑백을 든 사람도 군데군데 서있다. 그들은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이다.

‘병원’하면 떠오르는 사람을 묻는다면 대부분은 ‘의사, 간호사, 환자’라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제약사 영업사원들은 말한다. 병원은 의사, 간호사, 환자, 그리고

‘영업사원’으로 이뤄진다고.

 

제약사 영업사원 남상길 씨가 의사들을 면담하기 위해 병원 환자 대기실에 적힌 의사들의 이름과 진료시간을 메모하고 있다.

◆실적=능력=연봉

다국적 제약사 한국릴리의 당뇨 서부팀에서 당뇨병 치료제 ‘액토스’와 인슐린

‘휴마로그 믹스-25’를 담당하는 남상길(29) 씨는 이날도 오전 5시에 일어났다.

회사에서 의사들을 상대로 개최하는 조찬 미팅 겸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회사에서 오전 7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H의사를 모시고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10시경. 이때부터 영업사원들의 눈치작전이

시작된다.

내과 Y 교수를 만나기 위해 진료실 근처에 서있는 영업사원만 어림잡아 7, 8명.

의사가 영업사원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주는 일은 거의 없다. 진료가 비는 시간을

찾아 얼굴을 들이밀어도 “바쁘다”며 거부하는 의사들도 많다. 하루 일정을 최종

점검하던 남상길 씨는 Y교수와의 면담에 성공했다.

“경쟁사 제품이 2월부터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니까 우리 것을 쓰겠다고

하시네요. 오늘 일진 좋은데요”

병원에서 제약사 영업사원을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약제과장이다. 약제과는

병원에서 처방되는 모든 약품을 담당하는 곳이다. 서울 모 대학병원의 약제과장은

영업사원을 만나주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다. 남 씨도 일한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약제과장을 만나러 갈 때면 긴장된다고 한다.

경쟁사 영업사원과의 은근한 경쟁도 있다. 제약사 영업사원끼리는 ‘척하면 척’이다.

겉보기에 별 차이는 없지만 딱 보면 환자인지 영업사원인지 견적이 나온단다. 의사를

만날 때마다 경쟁사 동향을 물어보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과 친분 있는 의사 앞에선

일부러 ‘친한 척’도 한다.

영업사원은 ‘숫자’로 말한다. 실적이 곧 영업사원의 능력이자 실체다. 판매수당에

따라 월급이 결정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적이 나쁜 영업사원은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직장인 다국적 제약회사의 대졸 신입영업사원의 연봉은

‘3000~3500만원+α’정도. 인센티브에

해당하는 알파(α)가 기본급보다 많은 사원도 있다. 남 씨는 “능력이 곧 보수가

되는 시스템이 마음에 든다”며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영업사원 모두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사는 한국제약협회와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

회원사를 기준으로 볼 때 약 250개로 추산되며 대형 제약사의 경우 영업사원만 500명

정도 되는 경우도 있다. 남 씨 회사의 영업사원은 어림잡아 180명. 각 영업사원의

실적은 회사의 판매실적추적시스템이 알아서 집계한다.

Y 교수를 만난 후 낮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병원 로비에서 후배 여자 영업사원을

만났다. 남 씨 회사에서 항암제를 담당하는 신입사원 최고운 씨. 그녀는 ‘문고리’가

가장 두렵다고 말한다. 모든 신입 영업사원이 겪는다는 ‘문고리 공포증’이다. 제약

회사 신입 영업사원 대부분은 의사를 만나기 위해 진료실 문 앞에서 노크하고 문고리를 열 때 1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기다리고…또 기다리고…1시간은 기본

다른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있을 시간. 같은 병원의 L 교수를 만나기 위해

남 씨는 진료실 문을 10번 정도 들락날락 거렸다. 들어가려고 하면 환자가 들어오고,

통화 중이고, 간호사와 대화중이기 때문에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진료실 한편엔 설날용 선물이 쌓여 있다. 선물 개수로 봐 오전에만 얼추

5명의 영업사원이 다녀간 것으로 짐작된다. 남 씨는 “설날 선물, 안 할 수 없죠.

요즘은 제약사 리베이트니 뭐니 말이 많아 설날 선물도 가려가며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주 본인 담당 의사들에게 배를 한 상자씩 선물했다. 제약사 영업사원의

‘고객’인 의사들을 영업사원이 때마다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올 초엔 그가 관리하는 의사

30명에게 손으로 직접 쓴 연하장을 돌렸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내과를 들렀다. 이곳에서는 새로운

거래처를 뚫기 위한 남 씨의 고군분투가 시작됐다. 대학 병원이 아닌 동네 의원의

의사들은 종일 환자를 보기 때문에 더 많이 기다려야 한다.

“한 시간 넘게 기다릴 때도 있어요. 그렇게 기다려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1분

정도 주어지죠” 내과 원장을 만나기 위해 20여분, 약품을 담당하는 과장을 만나기

위해 또 30여분 기다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안 됩니다"였다. 당뇨병 약마다 효능과 특징이

약간씩 다른데 이 병원은 노인 환자들이 많아 남 씨가 담당하는 약품은 수요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남 씨는 “안 되면 될 때까지 올 거다”며 “약품에 맞는 환자가

한 명이라도 있는지 확인도 해볼 것이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제약사에서 영업사원은 절대적인 존재다. 마케팅팀이 따로 있긴 하지만 ‘행동대원’격인

영업사원의 역량에 따라 판매량이 달라진다. 감기약, 진통제 등의 일반의약품은 브랜드

인지도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병원에서 처방하는 전문의약품은 의사의 선택에

달려 있어 의사를 설득하는 영업사원의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성실성, 적극성, 매너 갖춰야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남 씨가 발을 옮긴 곳은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당뇨 전문

내과. 신길동 내과 병원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에 떨어져 있다. 영업사원치고 교통사고

한 번 안 나본 사람, 주차위반통지서 안 떼본 사람 없다고 한다. 남 씨도 지난해

말 출근하다 접촉사고가 났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차를 빌려 일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보름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얼마 전엔 주차장이 없는 동네 의원에 갔다가 견인되는

차를 사정해 돌려받았다. 종일 돌아다녀야하기 때문에 차가 없으면 업무 정지 상태에

직면한다.

 

남상길 씨가 한 의원의 내분비내과 전문의에게 자기 회사의 최신 당뇨병 치료제를 설명하고 있다.

병원에 들어서자 수간호사가 남 씨를 맞았다. 병원을 찾는 영업사원이 10명도

넘지만 남 씨만 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다. 수간호사 이 모 씨는 “제약사 영업사원의

역량에 따라 회사 이미지가 180도씩 변해요. 저도 처음에는 남씨를 얼마나 냉대했는지

몰라요”라며 웃었다.

남 씨는 대학생 때부터 외국계 제약회사에 관심이 많았다. 학부에서는 한약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생약학도 공부한 ‘한약사’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 부반장, 회장을 빼놓지 않고 맡는 등 외향적인 성격이라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영업사원의 꿈을 키웠다. 남 씨는 “단순히 토익 점수가 높고 학점이 좋은

것만으로는 영업사원이 될 수 없다”며 “무엇보다 자신의 성실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 씨는 영업사원하면 약장수를 떠올리는 고정관념이 싫다고 한다. 그는 “흔히

술 잘 마시고, 잘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를 보니 얌전하고 매너 좋은 매너남이다. 깔끔히 다려진 검은 양복,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깔끔한 머리에 은테 안경까지 영락없는 ‘범생이’ 스타일이다. 그러나 남 씨는

누구보다도 적극성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를 따라다녀

보니 ‘성격 참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시큰둥한 대학병원 조교부터 할머니를 따라 병원에

온 꼬마까지 모두 남씨의 친구로 만드는 친화력을 가졌다.

회사는 영업사원에게 하루 10명의 의사를 만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의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실제로는 무리다. 이 날 남씨는 의사 5명을 만나고

오후 5시경에 일을 끝냈다. 서류가방을 메고 있는 남 씨의 어깨가 처져 보였다. 약품

브로슈어, 판촉물, 서류들이 들어 있는 그의 서류가방은 5kg 정도. 생후 약 3~4개월

된 신생아의 몸무게다.

보통 오후 6~7시면 하루 일과가 끝나지만 술자리다 회식이다 해서 밤 12시를 넘길

때도 많다. 영업일이 끝나도 회사로 들어가는 일은 좀처럼 없다.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위해 들어가는 것을 빼곤 자유다. 자유로운 직업인만큼 장단점이 있는 셈이다.

이날 의사 5명을 포함해 약사, 간호사, 임상병리사 등 30명의 사람을 만난 남

씨는 의료진 대부분이 환자를 진정으로 위한다고 말한다. 의사, 간호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질병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애환이요? 나보다 더 질병에 대해 잘 아는 의사가 고객이다 보니 부담이 되죠.

욕심내지 않고 배우려는 자세로 일하고 있어요. 내가 파는 약품이 환자 치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이민영 기자

    저작권ⓒ 건강을 위한 정직한 지식. 코메디닷컴 kormedi.com / 무단전재-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댓글 0
    댓글 쓰기

    함께 볼 만한 콘텐츠

    관련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