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장병두, 배배 꼬인 사회

마음먹고 속이면 넘어갈 수밖에

미술을 진정 사랑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국내 미술관의 세련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미술관에

가는 일이 드물고 국내 미술계 동향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부터

고백해야겠다.

메트로폴리탄, 시카고, 프라도, 비엔나, 벨베데레, 루브르, 오르세, 대영박물관 등 세계 각국의 웬만한 미술관은

섭렵했고, 고흐와 달리 그림을 200점 이상 본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지만, 지금도 한국의 미술관은 나 같은 촌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신정아’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의 사기극이 언론에 처음 보도됐을 때에도 ‘충격’이라는 기사 제목을 보며 왜

충격인지 와 닿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해 어느 곳에서나 그런 사기극은 생길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속이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속지

않기란 참 어렵다. 희대의 사기꾼이 나타나면 많은 사람이 속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사기꾼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해 농락당한다면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가 없다.

이번 ‘신정아 사태’는 여러 모로 ‘황우석 사태’의 판박이다. 단순하게 보면, 황우석과 신정아는

거짓을 통해 이익을 취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깜냥을 넘어 권력을 쥐고 있는 무지한 ‘권력자’들을 이용하면 사통팔달(四通八達)이었다.



과학과 예술에 대해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정치권력, 언론권력이 고갱이에 있었고 이들을 통해 거짓말쟁이가 영웅으로

탄생했다. 건전한 비판자가 있었지만, 언로가 막혀 이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그러다가 결정적 증거가 나타나고 영웅이 날개가 꺾여 추락하는 과정도

닮았다.

추락하는 순간에도 “줄기세포가 1개면 어떻고, 11개면 또 어떠냐?”, “나는 학력이 아니라 실력으로 이 자리에 섰으므로

문제가 없다”며 자신을 변명하는 ‘거짓말 중독’의 습성도 닮았다.

두 사건이 무엇보다 닮은 점은 거짓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에도

이들이 또 다른 담론(談論)에 의해 우상화된다는 점이다.

황 박사의 사기극에 황당한 ‘미국 음모론’이 있었다면 신정아의 사기극에는

‘실력우선론’이 등장했다. 둘 다 반미, 학벌 타파 등 허상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

실력우선론은 신씨가 실력이 있는데 학벌이 없어서 거짓말을

통해 기존의 미술계를 농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벗어난 담론에는 어김없이 경박한 언론이 등장한다. 황우석 사기극에는 KBS의 PD가,

신정아의 사기극에는 오마이뉴스와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자칭 기자 또는 칼럼니스트가 등장한다. 오마이뉴스의 기자는 신정아가 황우석이 아니라 중졸의

서태지라고 했는데, 서태지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필자는 무엇보다 상당수가 이런 글들을 보고 환호한다는 사실에서

한국사회가 얼마나 배배 꼬인 사회인지 절감하게 된다.

사람은 100% 완전한 동물이 아니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곳에나

모순과 부조리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을 줄이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었다. 그 룰(Rule)을 지키고 그 안에서 경쟁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덜 망가지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아닌가?

논문 검증 시스템이나 교수 임용 시스템은 이런 원리에서 오류를 줄이고

합의를 이끄는 과정이다. 사기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룰을 무시하거나, 사회의 많은 구성원이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 룰을

백안시한다면 그 사회는 건전하게 성장하기 어렵다.

이 두 사기극과 궤도는 다소 빗나가 있지만 최근 조선일보 보도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장병두 씨’의 경우도 많은 부분이 오버랩 된다.
  
조선일보는 새전북신문의 보도를 인용, 지난해 11월 의료법

위반으로 기소된 장병두 씨(91)의 사연을 전했다. 장 씨는 2003년부터 2006년 8월까지 무면허 약사인 조카의 안내를 받아 3000여 회에

걸쳐 50만 원씩, 총 13억9800여 만 원을 받아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신문은 대학교수에서 성직자와 공무원,

가정주부, 학생 등 다양한 신분의 탄원자가 “현대의학에서 포기한 환자를 장 씨가 치료했다”며 장씨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누리꾼들은

의사, 한의사, 약사 등 제도권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간요법을 죽인다며 동조하고 나섰다.

장씨의 의료가 어느 정도 효험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필자는 과학적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장씨의 지지자들은 장씨의 탁월한 효험을 내세우지만 내가 아는 의사 중에 장씨처럼 효험을

내세우면 ‘천하의 화타’가 될 사람이 부지기수다. 논리적이지 않은 ‘체험례’는

사이비의료의 공통된 특성이기도 하다.

서울아산병원의 이춘성 교수는 물이 없는 풀(Pool)을 물이 차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다이빙했다가 목뼈가 부려져 병원에 실려 온 다이빙 선수를 치료했다.

이 교수는 환자가 회복될 가능성이 0%에 가깝다고

여기면서 나사로 목뼈를 연결만 해놓았을 뿐인데 이 환자는 기적적으로 회복됐다. 만약 이 교수가 이 환자의 회복을 자신의 업적인양 홍보했다면

그야말로 ‘세계의 화타’라는 칭송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 환자의 경우를 생명의 위대함 앞에서 더욱 겸허하게 환자를

보는 계기로 삼을 따름이다.

장씨의 탄원자 중 한 대학교수는 “암에 걸려 의사들이 한달 밖에 살 수 없다고 했지만 장씨 덕분에

살았다”고 주장했지만, 말기암에 걸려 아무 치료를 받지 않고도 감쪽같이 암이 사라진 사례도 학계에 여럿 보고 됐다. 말기암의 5년 생존율이

0%가 아니라 10%를 넘는다는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탄원자들은 장씨의 의료가 조선조 궁중의학에 뿌리를 둔 것이므로 이

의술을 살려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학에서는 세계 각국의 의학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며 필요한 것을 섭취해 발전하고 있는데, 수 백

년 전의 ‘비방’이 과연 현대의학보다 더 합리적일까.
게다가 장 씨는 한번도 자신의 의술을 공개해서 공론의 장에서 검증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신비주의’ 역시 사이비 의료의 또다른 특징이다.
사회 전체의 시각으로 봐서

장 씨는 법을 어겨 자신의 이익을 취한 사람일 따름이다.

누리꾼들의 장씨 옹호의 뿌리에도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배배 꼬인 사회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인 제도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병은 중환이다.
그러나 원인에 대해 우중(愚衆)만 탓하는 식으로 진단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언제나 주류 언로가 막혀

있으면 유비통신이 기승을 부린다. 주류 담론이 활발하지 못하면 사이비 담론이 뻗어 나가기 마련이다. 결국은 지식인들이 제 노릇을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이다.

현대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전문적인 일에 매진하면서도 담론의 생산과 소통에 관여해야 한다.
이미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언론이 잘 하겠거니 방치할 수도 없다.
참 지식인들이 외면하는 사이에 언론의 곁에는 정치적인 사이비 지식인들만이 끓고 있다.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나서야 한다. 그래야 사회를 지키고, 자신도 지킬 수 있다.

문득 1910년 경술국치를

접하고 음독자살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 구절이 떠오른다. ‘세상에서 지식인으로 제대로 살기가 참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라는 그 뼈아픈 구절이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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