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는 인간이 아닌가?

대법원 "아니다" 판결 계기로 윤리 논쟁 / '현실의 사람'-'형법의 사람' 달라 '불씨'

사람은

언제부터 생명의 가치를 지닐까? 생명으로서의 가치와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다른

것일까? 형법의 사람과 현실의 사람은 다른 것일까?

수정 후 출산되기 전까지 엄마 뱃속의 태아는 형법의 보호를 받는 ‘사람’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연거푸 나오며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의사단체와 종교, 시민단체는 대법원의 판결을 두고 해석을 달리하며 맞서고 있다.

법이 과학의 발전을 못 따라가 생명 경시 풍조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이번 판결이 생명경시를 부채질해 연 약 200만 건에 달하는 국내 불법 낙태에

기름을 붓게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대법원, “태아는 산모진통 와야 사람”

2001년 서울의 한 조산소에서 임신부 이 모 씨(37)는 출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진통이 오지 않았다. 조산사 서 모 씨(58)는 ‘좀 더 기다려 보자’며 병원 행을

미뤘고 결국 태아는 저산소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서씨는 임산부의 출산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태아를 사망케 한 혐의(과실치상

및 과실치사)로 기소됐으며 지난 9일 대법원은 무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태아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첫 시기를 산모가 분만통을 느낄 때부터(진통설)라고

판결, 엄마 뱃속의 태아는 사람으로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대법원2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판결문에서 “산모가 진통에 이르지 않은 만큼

이 사건의 태아가 업무상 과실치사죄의 객체인 사람이 됐다고 볼 수 없다”며 과실치상

혐의에 대해서는 “법체계상 태아 사망이 임신부에게 상해가 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1982년과 1998년에도 비슷한 사건에 대해 같은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

법에 따르면 태아가 비록 사람일지라도 형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현실의 사람과 형법의 사람은 다른가?

일반인의 시각에서 보면 대법원 판결은 다른 법률과도 상충한다.

‘모자보건법’에선 태아가 28주가 되기 전까지 정신장애,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

등 문제가 발생하면 인공임신중절수술(낙태)을 할 수 있게 돼 있고 이외에 낙태를

하게 되면 의사와 산모 모두 형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돼 있다.

또 ‘생명윤리기본법’에 따르면 배아도 생명으로 보호받게 돼 있다.

이에 대해 이정선 변호사는 “대법원의 판례는 ‘살인죄가 적용받는 사람’의

한계를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그래서 낙태도 살인죄가 아니라 낙태죄로

처벌한다”고 설명했다.

■생명경시와 낙태 부추길 위험

종교계와 생명윤리학계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사람’이며 ‘형법상

사람’이 다를 수는 없어 대법원 판결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법원의 논리가 국민이 낙태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 등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매년 150만~200만 건으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는 국내 불법 낙태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유전학의 급속한 발달로 수정 후 4시간이면 ‘유전자 각인’이라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유전자가 완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법조계의 과학에 대한 무지가

이번 판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의료계는 적절한 판결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양대의대병원 산부인과 박문일 교수는 “세계적인 기준을 봤을 때 적절한 판결”이라며

“만일 태아를 사람으로 보는 시기를 앞당기면 의사가 유산과 조산에 대해 잘못 진단할

경우 많은 의사들이 살인자가 될 것이다. 종교계 등에선 무책임한 주장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제부터 생명이고 언제부터 사람일까?

2005년 한국을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던 ‘황우석 사태’도 사실은 뿌리에 언제부터

사람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황 교수가 배아를 갖고 자유자재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수정 후 14일까지의

배아는 생명이 아니라는 사고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교리와 미국 과학계의

주류는 이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의 주류인 기독교 사회에서는 수정 이후부터 엄연한 생명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미 정부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제한을 가하고 있으며, 과학계는 ‘규제를

풀어 달라’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황 박사가 배아를 복제해 줄기세포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과학계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최근 유전학의 발달로 수정 후 4시간이면 유전자의 탈메틸화와 재메틸화

등 ‘각인과정’을 통해 개인유전자가 완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배아가 생명이라는

주장에 힘을 얻게 됐다. 과학자들은 유전자가 생명활동의 설계도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으며 일부 과학자는 유전자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형법상 사람’의 문제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각종 법에서 상충하는 ‘사람 규정’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체로 생명을 존중하기 위해 ‘사람’의 정의를 일원화하는

방향으로 매듭을 풀고 있다.

한 교육계 인사는 “현실의 사람과 생물학, 윤리학, 모자보건법, 생명윤리기본법,

형법의 사람에 대한 규정이 모두 다르면 도대체 아이들에게 사람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법무법인 해울의 신현호 변호사는 “우리 사회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간과하는

경향이 크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생명과 인간의 정의와 존엄성에 대해 토론해

생명 가치와 현실을 조화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운하 기자 newuna@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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