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경쟁력과 된장녀

“김 선생님, A병원 B의사 이야기 들었어요?” “무슨…?”

“그 친구 최근에 병원 내에서 자리를 옮겼더군요.” 며칠 전 술자리에서 한 의사의 동정이 화제가 됐다.

국내 굴지의 A병원에서는 의사들이 비보험 수술을 할 때마다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B의사는 고가의 수술이 효과 면에서 신통치 않은데다 수술이 잘못되면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썼던지라 ‘공격적인 수술’을 꺼려왔다. 이 의사는 병원 측에 ‘찍혔는지’ 내시경으로 경미한 환자를 시술하는 파트로 옮겼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가 인사의 원인이 됐을 수도 있지만 병원에서 수익을 위해 비보험 치료를 독려하고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당시 술자리에 있었던 의사들은 이런 현실에 탄식했지만, 이 말을 전해들은 일부 의사는 “병원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당연한 일이 아닌가”하는 반응을 보였다.

병원가(病院街)에서 경쟁력이 화두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많은 의사들이 도하라운드, 한미FTA 등이 체결돼 의료시장이 개방되면 미국의 거대자본이 몰려들어와 우리 병의원은 고사(枯死)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일부 적극적인 의료인들은 21세기의 국부(國富)는 의료산업으로 벌어들여야 하며 이를 위해 경쟁체제에 방해가 되는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의료계가 경쟁력을 갖춘다는데 뭐, 시비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병의원의 경쟁력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높일지에 대해서는 좀더 차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 의료계의 외형적 경쟁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의 유수 병원들을 방문할 때마다 한국 의료계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이라는 한 의학자의 견해가 떠올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1, 2위 병원인 존스홉킨스와 메이요의 의료진이 각각 삼성서울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했을 때 호텔식 시설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디카’ 누르기에 바빴다는 얘기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미국의 개원의원은 일반 사무실과 다를 바가 없으며, 한국 병의원처럼 ‘비까번쩍한’ 곳은 일부 부유층을 타깃으로 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병의원들은 최고의 인테리어, 최고가 장비를 위해 막대한 돈을 융자받고 이를 갚기 위해 극심한 경쟁을 벌인다. 많은 병의원이 양적 경쟁에 치중하고 의료행위의 품질개선보다 홍보전에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반면 미국 병의원의 경쟁력은 병원의 내적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의 병의원 의사들은 ‘의료기관평가합동위원회’(JCAHO·Joint Commission on Accreditation of Healthcare Organization)를 비롯한 병원 품질 평가기관의 ‘감사(監査)’에 가까운 조사를 받는다. 평가 항목으로는 병의원의 외형적 요소보다는 환자의 치료와 건강관리라는 본질적 요소가 중시된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병의원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의원의 겉치레 경쟁력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외형 지상주의, 속물자본주의의 속성과 관계가 있다. 필자는 최근 ‘된장녀 논란’, ‘인문학의 위기’ 등의 보도를 대하며 의료계를 떠올리곤 했다.

얼핏 보면 이 세 가지는 전혀 무관한 영역에서 벌어진, 상호 여집합의 관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교집합은 있고, 그것이 세 가지의 본질이다. 그 교집합에는 자본주의 이론의 태두격인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막스 베버가 경계한 ‘천민자본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고, 서양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인 ‘속물’(Snob)이 엎드려 있다.

된장녀를 보자. 된장녀는 허영에 가득 차고 명품을 선호하는 등 요즘의 ‘생각 없는 여성’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자. 지금 된장녀에게 발견하는 속성은 본질보다 외형, 역사보다 현재를 중시하는 것으로 요즘 한국인 대부분에게서 발견되는 속성이 아닌가.

실제로 된장녀를 비난하는 누리꾼들의 글을 보면 천박하기 그지없다. 이것들에서도 속물근성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된장녀를 비판하는 것은 투사자의 열등한 의식이 바깥에 반영된 ‘투사(投射)’일 따름이다. 경박한 사회, 속물 사회가 반영된 모습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최근 고려대의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교수 121명 전원이 ‘인문학 선언’을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당장 수익이 되는 일, 외형적으로 근사한 것 등만 추구해 왔다. 책도 우화(偶話) 위주로 가벼운 책만 팔리고, 깊이 있는 책은 외면당한다. 속물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행복을 추구하는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다시 의료계로 돌아가 보자. 우리 의료계의 경쟁력이 환자의 행복을 위해 논의되고 있는가? 병의원의 경쟁력이 자유민주주의를 건강하게 하고 그 구성원의 삶을 향상시키는 그런 경쟁력인가? 의료인들은 혹시 의료의 본질에서 벗어나 천박한 외형적 경쟁을 경쟁의 전부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을까?

물론 한국에서도 상당수 병의원과 의료인의 노력으로 전반적으로 의료의 품질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 학계에서 의료의 본질적 방향을 논의하는 ‘의철학회’가 생기는 등 속물자본주의적 의료에 대한 반성의 기운도 일고 있다.

그러나, 그러나 상당수 의료인들이 경쟁의 쳇바퀴 속에 갇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땅에서 눈앞의 수익, 뻔한 자본에 매몰돼 환자와의 소중한 인연을 무시하는 ‘된장 의사’가 사라지기를, 그래서 양심적 의사들이 도매금으로 비난받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의료가 경쟁력을 갖춘 모습일 것이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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