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이 없는 의사들

드라마 ‘하얀 거탑’과 유사한 의료소송에 대해 언론이 앞 다퉈 보도했다.

국내 소화기 분야 최고 명의(名醫) A교수가 암 오진 때문에 환자에게 1000만원을 배상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법원 판결에 따르면 A교수가 자신의 초기 판단을 과신해 정밀검사를 하지 않는 바람에 진행성 위암을 조기위암으로 오진, 암 전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A교수는 국내 위암 진료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분으로 필자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베스트 닥터’에서도 최고의 명의로 선정된 분이다.

신문(新聞)을 덮으니 상념들이 복잡하게 밀려왔다. 천하의 명의라도 실수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 ‘하얀 거탑’이 아니었다면 기사가 안 되지 않았을까, 환자가 의사의 실수를 눈감아주던 시대는 확연히 지났구나, 이제 한국도 본격적인 ‘의료과오(Malpractice) 소송’ 시대에 들어온 것일까, 무엇보다 이 시대의 진정한 명의는 어떤 사람일까….

필자는 1999년 A의사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당시 어머니는 그곳에서 ‘간 박사’로 유명했던 B의사에게 간염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병원의 류머티즘 전문의가 어머니의 다리가 붓는 것을 발견, “간 이상 때문에 온 증세인 듯하니 간 질환을 보는 분에게 문의하라”고 권했지만 B의사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다리가 부으면 정형외과에서 치료하라”고 버럭 화를 냈다. 어머니는 별 조치를 받지 못한 채 귀향했다가 2주 만에 간 혼수(昏睡)로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B의사는 학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 논문 발표에 등한시했고 환자에게도 권위적이기만 한 의사였다. 이런 일을 겪고 필자는 환자를 위한 최고의 의사를 소개해서 어머니 같은 희생자는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동아일보에 ‘베스트 닥터‘ 시리즈를 연재하게 된 계기다.

필자는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최고로 선정된 분들은 다른 분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점을 절감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야에 따라, 의사들에 따라 달랐다.

그리고 베스트 닥터로 선정된 의사가 대부분의 의사로부터 최고의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됐다.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인지, 그림을 그릴수록 난제(難題)가 됐다.

최고의 의사, 최고의 명의는 어떤 사람일까. 소비자의 기준에서 보면 경력도 있고, 실력도 갖춘 데다 항상 열린 자세로 환자의 궁금증을 풀어준다면 명의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디폴트(Default)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반면 지금과 같은 의료 경쟁의 시대에 이런 원론에 충실히 임하는 것만으로도 명의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의료계에서는 몇 년 전까지 의사를 환자의 몸을 고치는 소의(小醫), 몸과 마음을 다 고치는 중의(中醫), 사회를 치유하는 대의(大醫)로 나누고 대의를 최고의 명의로 치기도 했지만, 요즘 현재 그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의사도 많은 듯하다.

명의 여부와는 별개로 의사들은 어떤 사람을 삶의 모델로 삼고 있을까. 한국 의료계에는 훌륭한 명의가 많았지만 누가 현재 의사들의 모델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솔직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 의료계에는 장기려, 문창모 선생 등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릴만한 분이 적지 않다. 내과의 이문호, 신경외과 문태준, 소아과 홍창의, 외과 민병철, 이비인후과 노관택 등 수많은 의사들은 척박한 의료 환경에서 후학들이 갈 ‘고속도로’를 닦았다. 이 길이 있었기에 현재 외과의 이승규(간) 노성훈(위) 노동영(유방), 내과의 조보연(갑상샘) 한대석(콩팥) 박승정(심장) 방영주(항암) 김명환(콩팥), 신경외과의 윤도흠(척추), 신경과의 나덕렬 교수(치매) 등은 각각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의술을 꽃피울 수 있었다. 경영이란 점에서 보면 이길녀, 차경섭 박사 같은 분이 경영의 선도적 모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누가 의사의 모델일지에 대해서는 정답은 없는 듯하다. 누구를 모델 의사로 삼을까 하는 것은 모델을 원하는 의사의 품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는 바다에서 구만리를 솟구쳐 올라가 북명(北溟)에서 남명(南溟)으로 날아가는 전설의 새, 붕(鵬)을 매미와 비둘기가 비웃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 말로 풀이하면 “뭐 하러 저리 헛고생하느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릇이 간장 종기만한 의사가 붕과 같은 그릇의 의사를 보면 존경하기는커녕 비웃게 마련이다.

한국에서 모델이 될만한 많은 선배 의사들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의사가 자신의 모델을 찾지 않는다는 점은 아닐까. 또는 많은 의사들이 잘난 매미와 비둘기가 돼 대붕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 삶의 모델이 있다는 것은 무미건조하게 척박한 삶에 윤기를 더해줄 것이다. 소명이 식어갈 때 채찍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의에 대한 단 한 가지 정의(定義)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의사들의 모델이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역시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존경하지 못하는 의사, 삶의 스승이 없는 의사가 명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필자는 의사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삶이 좇아가야 할 스승은 누구인가?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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