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절규 그러나?

의사(醫師)는 지성인(知性人)일까, 아니면 단지 기술자일 따름일까?

필자가 1999년 어느 책에서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체험적 기술일 따름”이라는 한 일본 의사의 언명을 접하고 한동안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요새 그 충격이 되풀이된다고나 할까.

요즘 의료법 개정안과 관련한 의사들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에서 의사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되새겨보게 만든다. 필자가 만나는 의사들은 대부분 풍부한 독서량에 부드럽지만 명확한 어투에서 지성인의 품격이 풍겨 나오는데, 인터넷에서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의사들을 보면 의사의 위상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약분업 사태에서는 의사들이 반발할 이유가 충분했다. 정부가 북한과의 체제경쟁의 산물로 의약분업을 출범시키며 턱없이 낮은 수가를 보전하기 위해 여러 관행을 만들었던 역사를 하루아침에 무시하고, 의사들을 도적 떼로 여론재판 했으니…. 그리고 실제로 온갖 구체적인 도구로 의사의 지위를 허물었다. 이른바 자신을 도와줬던 은인에게 침을 뱉고 밥그릇을 뺏는 격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번 의료법 개정안은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의료인을 옥죄는 개정안이라고 단정 짓기가 어렵다. 이 법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제3자의 위치에서 보면 오히려 의료인에게 유리한 법이라고까지 보여 지기까지 한다.

주요 쟁점 별로 보자. ‘의료행위의 정의’ 부분에서 의협은 진찰, 검안, 투약 또는 외과적 시술 등 의료행위를 특정화하지 않으면 의사에게 당장 큰일이 날 것처럼 주장하지만, 특정화는 장단점이 있다. 10년 내에 일상화할 전자처방, 온라인 진료는 차치하더라도 현재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드레싱과 같이 적시하지 않은 부분은 의료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간호진단’ 조항은 오히려 간호진단의 정의를 명확히 함으로써 의사와 간호사 모두 윈-윈(Win-Win)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의사의 관리 아래 간호사를 가정에 파견하는 사업을 꼭 나쁘게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유사의료’ 조항도 이를 명문화했을 때 혼란이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명확한 정의를 통해 사이비 의료를 줄일 수 있다는 주장도 100%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게다가 표준치료제와 보수교육은 의사 쪽에서 주관할 수가 있고 면허허가제, 투약 위임제 등은 의협에서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주장을 개진하고 있어 설득력이 약하다. 이밖에 보수교육과 의료인의 설명의무, 진료기록 위 변조 금지, 입원실 야간당직제도, 병원감염관리 등의 조항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가능하다.

필자는 현재 흥분하고 있는 의사들이 필자가 미처 보지 못하는 더 중요한 점을 절감하고 있고, 그래서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의료법 개정 과정에서 드러난 의사들의 여론 형성 과정이 민주주의와 동떨어져 있다는 점은 지적해야겠다.

알다시피 이번 의료법은 이전 수 십 년 동안 개정 논의가 있었고 5개월 동안 집중적인 토의를 거쳐 만들어졌다. 6개 의료공급단체와 2개 시민단체, 변호사와 교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개정안을 도출했다고 한다.

물론 의사협회도 참가했다. 그런데 의사협회의 대표들은 의사들의 중지를 모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의문이다. 의료법 개정에 참가한, 비교적 중립적인 사람들조차 “K 씨 등 의협의 대표가 가만히 있기에 별 이의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하고 당황해 하고 있다.

협회는 이런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협회는 주요 안건마다 의사들의 여론을 구하는 치열함을 보였어야 한다. 의사들의 불만은 개정안 입법 예고를 앞두고, 오보나 잘못된 정보 등을 바탕으로 봇물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터졌다.

이 과정에서 온라인에서는 일부 의사나 전공의 의대생들은 자신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글을 보면 육두문자로 가득한 댓글과 악플로 공격했다. 초딩이나 중딩 악플러와 다를 바 없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검토하는 병원이나 교수들을 육두문자로 욕하는 일부 개원의들의 댓글을 보면서 우리 의료계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탄식이 나왔다.

의사들의 고충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의사의 지성과 위상에 맞게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 그런 길은 무한히 열려 있다. 왜 의사가 정당 아르바이트생처럼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악플을 달아야 하며, 왜 의사가 극렬 노동운동가처럼 메스로 할복을 시도해야 하는가?

이런 과정에서는 의사 스스로 내부의 논의 구조를 막고 과격한 표현이 합리적인 주장을 몰아내는, 의사(意思) 표현의 그랴삼 법칙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의사는 민주주의보다 전체주의, 사회주의의 의사(意思) 표현 모델이 더 익숙한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장동익 의사협회 회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정책상 서로 대척점에 있는 분 같지만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두 분 모두 탄핵의 벼랑까지 같다. 둘 모두 달변가(達辯家)이지만 이 때문에 거꾸로 설화(舌禍)에 휘말리는 일도 잦았다. 필자는 요즘 두 사람 모두 내부 위기를 대외 투사(投射)로 돌려 위기를 돌파한다는 얘기를 듣고 있는데 이 말은 사실이 아니기를 빈다. 노 대통령이 반미(反美)를 이용했듯, 장 회장은 반정부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대학 시절, 한 노(老) 교수의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바깥에서 확성기를 통해 “민주화 모임에 참가하자”는 독려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당시는 5공화국의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그때 그 교수는 수업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시위에 참가해야겠죠? 수업은 여기에서 마쳐야 할 듯 합니다…. 그런데,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의 말이 왜 저렇게 민주주의와 떨어져 있노…, 하기야 뱃속에서부터 민주주의를 모르고 컸으니….

필자는 20여 년 전 그 교수의 침울하고 안타까움이 배인 그 얼굴을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아마 의사들이 집단행동으로 무기력한 정부를 무릎 꿇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의사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집단이라도 개방과 투명화라는 시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차기 정부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면 훨씬 많은 영역을 양보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빈자가 부자를 혐오하는 ‘평등강박주의’, 자기가 모든 것을 가져야 하고 남에게 양보하자 않는 ‘유아적 사고’, 모든 것을 두 가지로 양분하는 ‘이분법적 사고’ 등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의사들은 이런 현상이 좌파 정치인들 탓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 이런 점은 없는지, 다른 의사가 잘되면 배 아파하면서 일반인이 의사를 매도하면 발끈하지는 않는지, 우리 스스로 토론보다는 힘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수는 없을까.

좌파 정부처럼 과거의 개념에 매일 것이 아니라, 미래의 무궁무진한 세계에서 무엇을 할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는 없을까. 좁은 영역의 이익을 두고 아귀다툼하는 사고방식에서 ‘Win-Win-Win-Win’의 무한 제휴로 사고유형을 옮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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