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선생님, 선생님

조선시대에는 격이 비슷한 가문끼리 혼례가 이뤄졌습니다. 영의정 3명 나온 집안이 대제학 1명 배출한 집안, 대제학 3명 배출한 가문이 산림처사 1명 배출한 가문과 비슷했지요. 김삿갓 같은 산림처사를 3명 배출한 가문은 선생 1명 배출한 가문과 동격이었습니다.”(김충렬 전 고려대 철학과 교수)

선생님은 일반적으로 아버지 연치의 어른에게 존칭어로 두루 쓰이지만, 유림에서는 공식적으로 성균관에 배향된 18현인(賢人) 정도라야 선생님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다고 해서, 역사적 업적에 논란이 있는 분의 위패에 ○○○선생이라고 쓰면 유림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만큼 품격 있는 존칭어다. 의사는 자신의 호칭이 얼마나 소중한지 간과하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스승[師]이라는 본래적 의미를 뛰어넘어 이 호칭으로 불리는 직업은 의사가 유일하다. 그 선생님들이 요즘 자신의 권위가 곤두박질치고 있어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최근 백혈병환우회가 성모병원의 진료비 과당청구 의혹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KBS ‘추적60분’이 보도하자 의사 사회가 들끓고 있다. 일부 젊은 의사들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의사들을 비난하는 누리꾼과 설전을 벌이고 있고, 대한혈액학회,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는 급히 성명을 내고 정부가 급여체계의 문제를 의료 당사자인 환자와 의사간의 갈등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의사들은 대부분 알겠지만, 성모병원은 우리나라 백혈병 치료가 선진국 수준으로 발돋움하는데 일등공신인 병원이다. 김동집, 김춘추 교수가 명동 시절 처음으로 골수이식에 성공한 후 이 병원은 국내 최초의 행진을 이어왔다. 물론 필자가 몇 년 전 만난 일부 다른 병원 교수들은 이 병원이 고가치료제를 쓴다고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원이 혈액암 분야 선도병원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필자는 정부와 언론, 일부 환자단체의 이분법적 시각과 여론몰이식 폭로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 의료계의 대응 역시 ‘욕하면서 배우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젊은 의사들의 혈기(血氣)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사회에 대한 불만을 특정집단에 투사하는 일부 누리꾼에 육두문자로 대응하기 보다는 우리 의료계가 한발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이 사회를 냉철히 분석하는 것이 보다 ‘선생님’답지 않을까.

의사협회도 성급했다. 협회는 추적60분에 대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법원은 기각했다. 법원은 이 프로그램이 취재경위,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의 정도, 보도내용의 정확성, 반론기회의 제공 여부 등 제반사항을 참작할 때 신청인의 명예, 신용을 훼손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볼 수 없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의료인의 처지를 아는 제3자로, 기각될 가능성이 높은 신청을 해서 결국 협회와 의사의 권위만 떨어뜨리게 돼 안타깝기만 하다.

많은 사람이 의료집단에 대해 부정적 눈을 갖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차분해야 한다. 주위의 모든 집단과 전투 대형을 갖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부 편향된 집단과 전투를 치르며 주위의 더 많은 우군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난 10월30일 KBS 1TV의 아침 방송 ‘주부 세상을 말한다’는 프로그램에서는 의사가 진실어린 목소리로 일반인에게 다가설 때 일반인은 그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시 박창일 세브란스병원장이 심사평가 시스템의 모순에 대해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 편에서 얘기하자 대부분의 주부들이 공감했다. 솔직하고 이성적인 환자가 목소리를 내서 계급적 적대감이나 피해의식에 근거한 소수 환자를 설득하도록 의사는 도와줄 수 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주변에서 자신들의 특수한 사정을 모른다고 하소연하지만, 필자가 만난 식자층은 한결같이 의료계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복지부 공무원들도 인정하다시피 현재의 의료 시스템은 출범 때부터 모순을 내포한 역사적 산물이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체제 경쟁의 산물로 의료보험을 출범시키며 저수가 정책을 유지하는 대신 의사들에게는 각종 편법을 묵인, 방조, 심지어는 장려했다. 덕분에 우리 국민은 세계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최단기간에 양질의 의료 혜택을 받게 됐지 않은가.

DJ 정부 때에 이런 배경을 거두절미하고 의사를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아가면서 의약분업을 실시해 정부와 의사 집단 사이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도 웬만한 사람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의사 선생님’이 지나치게 피해의식을 표출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다른 국가에서 몇 백 년 동안 이룬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몇 십 년 사이에 이루며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압축하고 있다. 의료계 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도 역시 비슷한 모순과 고충을 갖고 있다. 모순이 많을수록 고충이 많을 수도 있는 반면, 해야 할 일이 많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의사가 100% 만족하는 의료시스템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필자가 미국에서 연수할 때 각국에서 온 의학자, 보건학자들 중에 자기 나라 의료시스템에 만족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필자의 배부른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성모병원 사태를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은 매번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데도 왜 의료계에서는 비용과 효과에 대한 비교 분석 결과를 데이터로 제시하지 못하느냐 하는 점이다. 심평원 기준에 따랐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치료율, 장기 비용 등의 비교 결과가 축적돼 있어야 하지 않은가. 적어도 이번에는 그런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로, 의사에게는 왜 적극적인 우군(友軍)이 없을까 하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는 의사소통 환경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환자들도 구글에서 의료 정보를 얻는 세상이다. 인터넷 이용자들의 토론으로 만들어진 ‘위키피디아’가 전문가가 만든 ‘브리태니카’를 극복하는 세상이다.

의사와 환자의 정보 벽이 무너지는 세상에서 양심적인 환자와 함께 의료 환경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우군인 환자 그룹은 찾기가 힘들었다. 아직 여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부족해 안타깝지만, 이번 기회에 이런 움직임도 태동하기를 빈다.

셋째, 이번 기회를 의료 모순에 대해 보다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논의로 불을 지필 계기로 삼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2005년 심사평가원의 조정 및 환불 액수는 396억원이다. 필자 같은 가난뱅이에게는 이 돈이 엄청난 돈이지만 현 정부가 매년 쓰는 이데올로기성 사업 예산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이다.

이제는 우리 정부 예산이 국민을 싸우게 만드는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국민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복지 영역으로 옮기도록 적극적으로 여론을 조성해야 한다. 현재 의사를 공격하는 시민단체의 상당수 역시 이데올로기 영역에 있으므로, 여기에 찬성하지 않을 듯하지만, 국민을 내편으로 만들어 근원적으로 의료 시스템의 모순을 풀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사도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자정할 것은 자정해야 한다. 필자가 미국에서 연수할 때 미국의 보건학자와 의학자들이 ‘의사가 교사들보다 5배 이상 많이 버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주제로 수업하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데, 의사가 자신을 열고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의사 집단에서 극소수 악덕 의사를 몰아내는 자정 운동을 벌이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자정이 가능하다면, 불필요한 규제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것이다.

많은 의사들이 필자의 이 같은 소리에 대해 현실을 도외시한 낭만적 주장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KBS TV에서 박창일 병원장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주부들의 진심어린 얼굴에서, 필자는 의료계의 희망과 내일, 사명을 보았다. 의사가 서로만을 바라보지 않고 봐야할 곳을 보면서, 버릴 것은 버린다면 의사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집단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 아닌가.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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