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DS 편견의 벽을 깨자

경기도에 사는 30대 주부 김모씨는 1999년 영문도 모른 채 자신과 남편, 딸 아람이(가명)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병원에서 받았다. 그리고 5년째 에이즈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주위의 편견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누군가 저희 가족의 가슴을 찢는 말을 해도 이제는 그들을 대신해 우리 가족이 짐을 지고 있을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가족에게 드리운 짙은 먹구름은 아람이에게 먼저 찾아왔다. 아람이는 생후 8개월 때부터 각종 병치레에 시달려 치료를 받아왔다.

감기와 폐렴이 끊이지 않았고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던 중 병원 측에서 혹시나 하며 에이즈 검사를 한 결과 양성으로 나왔다. 곧이어 김씨 부부도 양성 판정을 받았다.

감염 경로는 정확치 않지만 비슷한 나이의 남편이 결혼 전 몇 차례 직업여성과 관계를 맺은 것 이외에는 짚이는 게 없었다. 김씨는 망연자실한 채 배를 내려다봤다. 당시 임신 6개월째였다.

다행히 김씨가 주치의의 지시에 따라 약을 복용한 덕분에 아람이의 남동생은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은 채 태어났다.

이후 김씨 가족은 주위의 냉대, 편견, 모욕에 눈물을 흘리는 삶을 살았다. 친척과 이웃은 그들이 에이즈 환자임을 알아차린 뒤 냉랭하게 변했다. 남편은 일자리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지방의 한 도시에서 살던 김씨 가족은 이곳을 떠나 전국을 전전하다 경기도의 한 연립주택까지 왔다. 부부 모두 신용불량자가 된 지도 오래다.

김씨는 자신도 쉬 피로를 느끼는 등 몸이 좋지 않지만 아람이가 건강하게 커가는 것만을 기도하며 살고 있다.

아람이는 한때 2, 3개월마다 갑자기 고열과 폐렴 증세를 보여 응급실에 실려 갔고 2000년 말에는 죽을 고비까지 넘겼지만 서서히 면역세포 수가 많아지면서 건강을 되찾고 있다.

아람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이전에는 밖에서 다른 병에 감염될지 몰라 바깥 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친구도 없었다. 어린이날에도 사람이 많은 곳에 갈 수 없었다. 지금은 날마다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를 엄마 앞에서 부르고, 신데렐라가 되고 싶다며 재롱을 부린다.

김씨는 아람이에게 예쁜 옷을 사주고 싶다.

아람이는 몇 년 동안 키가 크지 않은데다 늘 고열 때문에 옷을 벗고 살다시피 해 김씨는 세살 때 이후 딸의 옷을 산 적이 거의 없다.

아람이는 불쑥불쑥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왜 나는 이렇게 감기에 잘 걸리지?”, “왜 요즘은 아프지도 않은데 감기약을 먹어야 해?”

김씨는 그때마다 “아람이는 아이스크림과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감기에 잘 걸리고 지금 안 아파도 감기를 예방하려면 약을 먹어야 한다”고 둘러대곤 한다.

○AIDS 정복의 꿈 ‘칵테일’이 막는다

에이즈 바이러스(HIV)는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킨다. 따라서 일단 발병하면 현재 치료제로는 기껏 1, 2년 생명을 연장할 수밖에 없다. 치료제 개발도 요원하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에이즈는 현재 ‘완전정복’을 앞두고 있으며 단지 사람들의 무지 미신 편견이 치료를 방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왜 그런지는 HIV의 작동 원리와 치료제의 특성을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HIV의 작동 원리=HIV는 면역계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 역할을 하는 CD-4 세포에 침입해 자신이 증식하는 공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울러 CD-4 세포를 격감시켜 면역기능을 떨어뜨린다.

그 과정은 이렇다. 우선 HIV는 CD-4 세포의 세포벽에 있는 문고리를 따고 자신의 RNA를 세포 안에 침투시킨다.

RNA는 DNA로 변신하는 ‘역전사(逆轉寫)’ 과정을 거쳐 세포핵 속으로 자리를 옮겨 사람의 DNA 틈을 비집고 자리를 잡는다. 그곳에서 단백질을 만들어 핵 밖으로 내보내며 바깥에서는 단백질 분해효소가 긴 단백질을 자르고 묶어 HIV 꼴로 만들어 세포 밖으로 내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HIV의 ‘새끼들’은 CD-4 세포 밖으로 나가 다른 CD-4 세포를 사냥한다.

▽HIV를 융단 폭격하라=이런 메커니즘이 확연히 밝혀짐에 따라 의학자들은 HIV의 RNA가 DNA로 바뀌도록 돕는 효소와 단백질 분해효소의 기능을 각각 억제하는 약들을 개발했다. 현재 역전사 효소 억제제 10가지와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제 6가지가 나와 있다.

이 중 3, 4가지 약을 한꺼번에 먹는 ‘칵테일 요법’이 놀랄 만한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 13개 연구진이 1만275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상시험 결과 적절한 시기에 칵테일 요법으로 치료받은 사람은 3년 안에 말기상태에 이르거나 숨질 확률이 3.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은 경우 절반이 숨졌다. 병이 생기자마자 칵테일 요법을 받으면 체중, 기력, 면역기능이 한꺼번에 회복된다.

▽복용하기 편하게=많은 사람들이 HIV가 끊임없이 변이해 약이 안 듣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약을 꾸준히 복용하지 않아 내성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대체로 에이즈 환자들은 너무 많은 약을 복용해야 하는 고통 때문에 복용을 중단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한국에서는 감염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는 경우가 많아 다른 약과 함께 한꺼번에 20알씩의 약을 먹어야 하는 고충이 따른다.

국내에서 두 가지 역전사 효소 억제제를 합친 약이 나왔지만 정부에서 건강보험 인정을 해주지 않아 ‘그림의 떡’이 되고 있다. 외국에서는 하루에 두 알만 복용하도록 한 ‘트리지비어’까지 나와 있지만 한국 환자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또 칵테일을 장기 복용하면 지방 대사에 장애가 생겨 혈중 지방농도가 올라가는데 이를 해결하는 약 ‘아타자나비르’도 선보였다.

▽속속 등장하는 신약=‘칵테일’에 추가할 수 있는 신 개념의 약들이 잇따라 개발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HIV가 CD-4의 문고리를 따고 들어갈 때 ‘특수열쇠’로 문을 따고 세포막끼리 몸을 합치는 ‘융화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 과정을 막아내는 약을 선보였다.

올해 초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시판 허가를 받은 ‘푸지온’이 바로 그 약인데 임상시험에서 어떤 치료법도 듣지 않는 환자에게 괄목할 만한 치료 효과를 보였다. 이 약이 기존의 칵테일에 추가되면 치료 효과를 배가시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현재의 칵테일 요법으로는 HIV의 RNA가 DNA로 바뀌어 사람의 DNA 사이로 살짝 끼어들어간 상태에서 증식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이를 알아내 박멸할 방법이 없다.

최근 미국에서는 HIV의 DNA가 사람의 DNA 사이로 끼어들어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약도 개발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치료 백신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치료 백신은 바이러스 전체가 아닌 DNA 또는 RNA의 일부를 인체에 주입해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체가 CD-4 세포 밖에 떠도는 HIV를 알아채고 죽이려고 시도한 ‘1세대 백신’은 대규모 임상시험 결과 실패로 드러났다. 현재 포항공대 성영철 박사팀 등 수많은 연구팀이 감염된 세포를 죽이는 ‘2세대 백신’을 두고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에이즈 감염은 더 이상 사형선고가 아니다. 현재도 의료진의 지시만 잘 따르면 큰 탈 없이 생활할 수 있고 이런 신약들이 등장하면 ‘에이즈 정복’은 현실로 다가올 듯하다.

▼국내감염인의 명암▼

2003년 에이즈 환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뉴스는 국내 감염 1호인 정모씨(41·여)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정씨는 1985년 국내 첫 감염인으로 알려진 인물.

그러나 그는 에이즈는 허구의 병이고 바이러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서 치료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일부 방송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여과 없이 보도해 치료를 잘 받던 환자들이 약 복용을 중단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소외된 에이즈 환자들에게는 TV에 떳떳이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치는 정씨가 ‘언니’였고 ‘누나’였다.

그는 2002년 설사 때문에 탈진 상태로 입원한 데 이어 2003년 5월에도 결핵과 설사 증세가 겹쳐 입원했지만 대증(對症) 치료만 받고 퇴원했다. 7월 중순 결핵균이 온몸으로 퍼져 정식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때는 늦었다.

그는 11월 초 ‘에이즈가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에이즈 감염인으로 밝혀진 2호 환자인 김모씨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김씨는 정씨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지만 병원 치료를 꾸준히 받았다는 점에서 정씨와 달랐다. 자영업을 하는 그는 활기차게 일하면서 사업도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환자의 극명한 대비는 에이즈는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며 에이즈 감염자나 환자의 가장 큰 적은 무지(無知)임을 보여준다.

○AIDS편견의 벽을 깨자=죽음보다 꺼리는 신분노출

50대 주부 A씨는 직장에 다니는 딸(29)의 고백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딸은 5년 전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고 에이즈에 감염됐다. 딸은 이 사실을 부모는 물론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한 친구가 우연히 알아버렸다.

그 친구는 “너희 엄마에게 이르겠다”며 협박해 온갖 선물을 요구했고 딸의 카드빚은 3000만원이 넘었다.

A씨가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자 딸은 “우리 가족 모두가 남한테 손가락질 받는 것이 무서웠다”고 울먹였다.

국내의 에이즈 환자들은 사회의 싸늘한 시선과 부당한 대우 때문에 응달 속으로 몸을 숨긴 채 살며 고통을 겪고 있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가 2003년 서울에 사는 에이즈 감염인 253명을 대상으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37%(93명)가 ‘신분 노출’이라고 대답했다. 경제적 곤란(29%)이나 건강 악화(27%)보다도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더 겁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서 10년 가까이 에이즈 환자를 돌보고 있는 외국인 수녀 K씨는 “한국인은 누구나 에이즈에 걸릴 수 있는 성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에이즈 환자에게 상처를 주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에이즈에 걸린 사람도 죄인처럼 발병 사실을 숨겨야만 한다. 혈우병에 걸려 혈액제제를 투여 받았다가 에이즈에 걸린 환자도 마찬가지다.

쉬쉬하는 분위기는 한 가족을 평생 가슴 졸이게 만든다.

C씨(32·여)는 남편과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는데 이듬해 남편은 신체검사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됐다. 한동안 C씨는 주위에서 ‘왜 아이를 갖지 않느냐’고 다그칠 때마다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는 세월을 보냈다. 솔직하게 이유를 대면 당장 이혼하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

그러나 남편을 사랑한 C씨는 예방 차원에서 에이즈약을 복용한 채 관계를 가져 아기를 낳았고 다행히 산모와 아기 모두 감염되지 않았다.

이제 C씨는 나중에 아기가 아빠의 감염 사실을 알까봐 걱정하고 있다.

에이즈 환자를 근거 없이 배척하는 것은 가족구성원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서울대 의대 감염내과 오명돈(吳明燉) 교수는 “부모는 대부분 에이즈에 걸린 자식을 헌신적으로 간호하지만 자녀는 에이즈에 감염된 부모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에이즈 감염인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음지로 숨을수록 에이즈가 확산될 가능성은 오히려 커진다.

오 교수는 “최근 남성 감염인 중에 성병에 걸려 병원을 찾는 이가 늘고 있다”며 “이것은 에이즈가 음성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이즈퇴치연맹과 서울보건대학원의 조사에 따르면 지적 수준이 낮고 에이즈에 대해 모를수록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K수녀는 “침묵은 에이즈 바이러스를 행복하게 할 뿐”이라며 “정부와 언론은 하루빨리 응달에 있는 에이즈 문제를 양지로 끌어올려 공론화하고 예방책과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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