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망상증

“집에서 혼자 TV 뉴스를 보다가 한 대통령 후보를 욕했다. 아침에 누군가 승용차 앞에 일부러 쓰레기를 갖다 놓았다. 독백(獨白)까지 도청을 하다니….”(20대 여성)

“국가정보원에서 뇌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온갖 비밀을 빼간다. 청와대도 한통속인지 민원을 접수시켜도 답이 없다.”(30대 남성)

2002년 도청(盜聽)이 정치 사회문제로 불거졌을 때 언론사에는 도청 피해를 호소하는 온갖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상당수는 이처럼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피해망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하소연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최근 도청과 몰래카메라 등의 확산이 사회 구성원들의 피해의식을 부추기고 있다”면서 “피해의식이 지나쳐서 정신병으로 진행돼 고통받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고 말한다.

▽피해의식도 정도가 있다〓피해의식은 인간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본성.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피해의식에 젖는 ‘피해망상(被害妄想)’도 자기 보호를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망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병이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피해망상도 종류가 많다.

우선 억울한 일을 겪은 뒤 누군가 날 괴롭히거나 감시한다는 생각 때문에 공포나 불안감이 지속돼 생활이 불편하다면 ‘신경증적 망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에는 보통 ‘아닐거야’하고 되뇌면서도 괴로워하는 것이 특징.

고집이 세고 남을 잘 의심하고 불안에 잘 젖는 사람은 ‘편집증적 성격장애’인데 이 경우에는 없는 일을 지어내 생각한다. 그러나 헛생각이 생겼다가 금세 없어지고 늘 머리를 맴도는 특정한 망상은 별로 없다.

피해의식이 정도를 넘으면 가정이나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진다. 망상장애와 정신분열병이 그것이다.

▽심각한 망상〓앞서 예를 든 20대 여성은 망상장애의 대표적 종류인 피해망상장애 환자일 가능성이 크다. 망상장애는 편집장애라고도 불린다. 최소 한 달 이상 실제 일어나지 않은 도청, 독살, 감염 등 때문에 괴로워한다. 또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거나 연인 또는 배우자가 부정(不貞)을 저지르는 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망상장애자는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단정하기 때문에 인격이 허물어진 정신분열병 환자와는 금세 구분할 수 있다. 정상인과 구분이 쉽지 않지만 대화를 하면서 곰곰이 살펴보면 의심이 많고 시비를 잘 가리려 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망상장애자는 대부분 평소 우울감을 느끼며 정신분열병 환자에게 나타나는 환각이나 환상은 거의 없다.

피해망상의 종류도 다르다. 망상장애자가 “경찰이 따라다닌다” “상사가 의도적으로 괴롭힌다” 등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생각을 한다면, 정신분열병 환자는 “미확인비행물체(UFO)가 감시한다” “정부에서 뇌의 정보를 자꾸 빼간다” 등 불가능한 망상을 한다.

앞에서 예로 든 30대 남성은 뇌의 이상으로 사고나 감정의 조절능력이 허물어진 정신분열병 환자일 가능성이 크다.

▽망상의 대책〓피해망상을 갖고 있는 사람 중 정도가 가볍다면 자신감을 찾는 것만으로도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감은 가족이나 동료와 대화를 자주 갖거나 취미생활, 명상 등을 하면서 회복할 수 있다.

망상의 정도가 심하면 병원 치료가 필요하다.

신경증적 망상장애자는 자신이 괴롭기 때문에 병원 치료에 큰 거부감을 갖지 않지만 편집증적 성격장애, 망상장애, 정신분열병 환자는 병원에 가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특히 망상장애 환자는 병인지 아닌지가 헷갈리지만 분명 병이다. 미국에서는 경찰, 가족, 고용주 등에 이끌려 병원으로 가지만 국내에서는 병원에 가는 환자가 아주 적다.

피해망상 환자는 그냥 놔두면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이나 살인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치료가 꼭 필요하다. 환자는 뇌신경전달 물질의 분비를 조절하는 약을 복용하며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훈련을 한다.

피해망상장애의 경우 환자가 제대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족이 도와주는 방법을 가르치는 ‘가족치료’도 매우 중요하다.

◆ 망상장애 종류도 갖가지

허튼 생각이 한 달 이상 머리를 떠나지 않는 망상장애(妄想障쒉)는 사교성이 없고 성취욕에 비해 성취도가 낮은 사람에게 잘 나타난다.

성격에 문제가 있어 의심, 질투심이 많거나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특정한 시기에 갑자기 증세가 나타난다. 이런 사람은 좌절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가상 상황’을 설정하고 책임을 돌림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것이다.

망상장애 중에는 피해망상이 가장 많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부정(不貞) 및 질투망상〓이른바 의부증, 의처증 등이 해당되며 연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기도 한다. 대부분은 별거, 이혼, 배우자의 사망 등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만 환자는 이후에도 옛날 연인이나 배우자가 외도를 했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다.

▽애정망상〓유명인, 지위가 높은 사람, 직장의 유능한 상사 등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상대방이 부정해도 ‘비밀스러운 사랑’으로 해석한다. 남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스토킹’을 잘 한다. 대개 여성에게 많고 남성은 여성을 괴롭히다가 구속되기도 한다.

▽과대망상〓자신이 남들은 모르는 재능이나 통찰력을 가졌거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망상이다. 사이비 교주나 정치인에게서 많은 망상이다. 일부는 과대망상 때문에 스토킹을 가장해 죄없는 사람을 법정에 세우기도 한다.

▽신체장애망상〓자신이 특정한 질병에 걸려 있다고 여긴다. ‘유사 에이즈 환자’ 중에는 이런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많은 환자는 의사가 무능해서 진단하지 못할 뿐이라고 여긴다.

▽혼합망상〓여러 가지 망상이 겹쳐서 나타나는 것.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어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는 애정망상과 과대망상이 함께 생길 가능성이 크다.

◆"혹시 나도 망상증?…" 체크해 보세요

▽편집증적 성격장애

①충분한 근거없이 다른 사람이 자신을 관찰하고 해를 끼치고 속인다고 의심한다.

②친구나 동료에 대한 근거없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다.

③어떠한 정보가 자신에게 나쁘게 이용될 것이라는 잘못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기를 꺼린다.

④남이 호의적으로 말하거나 좋은 일이 일어나도 자기의 품위를 손상시키거나 위협적인 숨겨진 의도를 읽어내려 한다.

⑤지속적으로 원한을 품는다. 즉 사소한 모욕이나 상처를 받아도 상대방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다.

⑥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데도 자신의 성격이나 명성이 공격당했다고 느끼고 즉시 화를 내거나 반격한다.

⑦아무 근거 없이 배우자의 순결성을 자꾸 의심한다.

☞4개 이상이면 해당하고 피해망상, 애정망상 등이 잘 생긴다.

▽자기애적 성격장애

①자신의 성취 능력 등을 과대하게 여긴다.

②무한한 성공 권력 명석함 아름다움 이상적 사랑과 같은 공상에 몰두한다.

③자신의 문제는 특별해서 특별히 높은 지위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④과도한 칭찬을 요구한다.

⑤자신이 특별한 자격이 있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남들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기대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는다.

⑥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이용한다.

⑦다른 사람의 느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⑧다른 사람이 자신을 시기한다고 믿는다.

⑨남들이 오만하고 건방지다고 얘기한다.

☞5가지 이상이면 해당하고 과대망상, 애정망상 등이 잘 생긴다.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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